쓰기는 읽기에 비해 진입장벽이 높다. 읽기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읽을 수 있다. 비록 이해 못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읽기는 어떤 어렴풋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쓰기는 어떤 경우 한 글자도 쓸 수 없다. 그래서 쓰기는 익어야 하는 것이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LEVEL에 도달하기까지 쓰기는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다. 쓰기에는 잘 쓰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 잘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100%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있을까? 이것은 글쓰기 신선의 경지 에 오른 도스토옙스키에게도 매우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쓰는 순간 TEXT는 작가를 떠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쓰는 순간 글은 집 나간 자식처럼 그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무 자신의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된 형태로 나왔다면, 만족하자! 그리고 그 글에 자유를 줘 버리자!
“돈이 필요할 때, 연기는 더욱 절실해진다” – 어느 인터뷰에서 윤여정 씨가 했던 말이다. 아들을 키우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그 절실 함이 자신의 연기력을 키웠다는 설명이다. 돈에 대한 절실함이 연기의 추진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쓰기에서도 이러한 사례가 있을까? 늘 빚에 쪼들리던 도스토옙스키가 좋은 사례는 아닐까? 도스토옙스키는 도박을 위해, 신혼여행을 위해, 도박 빚을 지거나, 선불을 받거나, 늘 빚에 쫓기는 삶을 살았다. 그에게 빚은 소설 창작의 추동력이었을까? 만약 그가 부유한 사람이라면 위대한 소설가가 되 지 못했을까? 귀족 출신 나보코프나 대지주 톨스토이를 생각해보면 꼭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돈은 소설의 추진력이라기보다는 ‘쓰기’의 추진력 정도는 될 듯하다. 그것도 매우 개인적인 차원에서 만 말이다.
쓰기를 추동하는 힘은 무엇일까? 글쓰기는 경험, 관찰 그리고 읽기에 의하여 추동될 수 있다. 많고 다양한 경험과 사건과 대상에 대한 면밀한 관찰은 사람의 머릿속에서 어떠한 생각을 일으킨다. 현상과 대상에 대한 관찰은 그것에 대한 감정이입과 더불어 표현의 욕구를 추동할 수 있다. 그리고, 읽기도 경험의 부분으로 볼 수 있지만, 쓰기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측면에서, 특히 쓰고자 하는 사람의 읽기는 모방, 질투, 부러움의 감정을 만들어 낸다는 측면에서, 읽기는 쓰기를 추동하는 보다 강력한 힘이 된다. 이런 경험, 관찰과 읽기를 통해 추동된 쓰기는 시든, 소설이든, 에세이 든 글의 형태로 완성되는데, 이런 글은 게시, 공표, 출판과 같은 과정을 만났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자기 혼자 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일기를 쓰는 것이다.
그럼 글쓰기의 마지막 과정으로서 ‘보여주기’ 를 추동하는 힘은 무엇일까? 경제적인 절실함, 허세 그리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같은 것은 아닐까? 도스토옙스키의 쓰기는 경제적인 절실함이 추동한 것일 수 있다. 밥벌이의 현실적인 절실함이 쓰기를 추동한 것이다. 그리고 쓰기의 추동력으로써 허세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과 유사할 수 있는데, 이경우 쓰기는 욕구와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본능 정도 로 여겨질 수 있다. 뭔가 거창할 것 같은 쓰기가 고작 나의 본능, 욕망이라니…, 갑자기 쓰기가 참 쓸데없어 보인다.
쓰기의 비전은 무엇일까? 내 생각에는 ‘보여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게시, 공표, 출판의 욕구는 ‘보여주기’라는 말로 묶을 수 있을 것 같다. 자기 혼자 보기 위하여 글을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쓰기 자체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욕망에 의해 추동되기 때문에, 즉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의 영역에 근거하기 때문에, 보여주기는 쓰기의 추진력이면서, 동시에 쓰기의 비전이 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글, 그것은 일기뿐이다. 특히 개인적으로 브런치를 시작하며, ‘보여주기’는 쓰기의 진정한 비전임을 깨달아 간다. 매일매일의 조회수, 가끔씩 공지되는 작가를 위한 응모의 기회, 나의 친구들(동지들) 이 눌러주는 라이크 개수에 일희일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생소한 나를 대할 때면, 다시 한번 쓰기의 비전은 ‘보여주기’ 임을 절절하게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