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직장문화
일본의 역사와 전통은 생활 곳곳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으며, 직장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일본의 직장문화의 기본은 오랫동안 사회의 기반이 되어온 유교적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권위적인 위계질서‘와 ‘동료 간의 조화로운 협력‘을 중시한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적 근대화와 산업화를 진행하면서도 유교적 가치를 유지하며 ‘가족적 분위기‘, ‘장기 고용‘ 등을 강조하며 직장 내 결속력을 강화하였다. 특히, 2차 대전 후 전후 복구를 위해 도입된 ‘종신고용‘과 ‘연공 서열‘ 시스템은 경제성장기에도 ‘충성심’과 ‘공동체 의식’을 성공적으로 강조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의 거품경제 붕괴 이후 장기 불황이 이어지면서, 일본 기업들은 구조적 문제 해결과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성과 기반 보상 제도‘ 등의 서구적 경영방식을 도입하려 하고 있으나, 아직도 전통적인 직장문화와 방식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하게 남아 있으며, 종종 글로벌 경쟁력보다 우선시되는 경향이 있다. 이 글에서는 일본에서 근무하면서 느꼈던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직장문화를 소개해보려 한다.
10여 년 전 미국의 글로벌 IT 회사의 아시아 HQ인 싱가포르에서 인터넷 개발부 리더로 아시아 시장의 제품 니즈와 개발, 출시 등을 관리하였었다. 리먼 사태로 인한 세계 경기 침체가 시작되면서, 동남아 새 시장보다 동북아의 기존 시장에 집중하기로 하여, 아시아 HQ를 일본 도쿄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내 일본에서의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고, 이전에도 원격으로 일본 팀을 관리해 왔기 때문에 큰 부담은 없었다. 글로벌 제품을 다루고 본사에 직접 보고하는 개발 부서였으므로 싱가포르에서 했듯이 미국과 유럽 본사의 전략과 근무 방식을 일본에서도 계속 적용하여 아시아 HQ로 팀을 개편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일본의 독특함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으나, 일본 팀원들도 이 다국적 대기업에 오래 근무해왔으므로 글로벌 팀으로 키우는 것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작은 일이지만 다른 점을 느껴가면서 직장문화의 차이를 하나씩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나 다른 나라에서는 점심시간에 가볍게 메신저로 대화를 걸며 함께 식사하러 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웠는데, 일본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에서는 점심 식사의 경우에도 미리 약속을 잡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일본에서는 매니저와 대화 등은 계획적이어야 하고 즉흥적인 만남을 피하는 경향이 있음을 느꼈고, 가볍게 혹은 우연한 대화를 통해 마음 편히 소통하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싱가포르에서 원격으로 일본 팀과 일할 때는 영어로 대화하며 대부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답변과 성실한 팔로우업으로 분명한 결과를 내곤 해서 일본팀에 대한 신뢰도나 기대가 컸다. 그런데 일본에 와서 직접 일해 보니, 글로벌 지침이 있어도 예외 상황을 주장하거나 여러 이유로 일 처리가 어렵다고 하기도 하며, 내가 보기에는 작은 일들을 매우 중요한 문제로 다루려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 직원들은 대부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나는 어느 정도 일본어로 대화가 가능해서, 상황에 따라서 영어 또는 일본어로 회의를 하곤 했다. 그런데, 영어로 회의할 때는 대체로 긍정적인 분위기였지만, 일본어로 회의를 진행하면 이런저런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고 강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곤 했다.
피플 매니지먼트 측면에서도 문화 차이를 체감했다. 일본인 팀 매니저와의 1:1 미팅에서 그는 일본인 직원들의 근무 태도나 사적인 문제를 내게 부정적으로 보고하곤 했다. 같은 유교 문화권 출신으로서, 일본 매니저들이 부하 직원들을 감싸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는 완전히 틀렸다. 하루는 그 일본 매니저가 또 굳이 내가 알 필요 없는 이야기들까지 털어놓기에,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그냥 알고 계시면 된다“라고 답하며 자신의 보고 의무를 다했음을 강조했다. 즉, 그는 내게 어떤 조치나 평가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보고만 하는 것이었다.
개발부의 특성상 사용자들의 요구나 피드백은 중요한 제품 개발의 원천이 되곤 한다. 특히, 아시아나 일본 사용자들의 독특한 선호도의 파악이나 제품에 대한 불만 등은 추후 제품의 시장 장악을 위해 무척 중요하다. 그런데, 일본 직원들은 문제를 다룰 때 매우 세심하고 철저하게 접근하지만, 때로는 작은 문제 하나라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제품에서 사소한 오류가 발견하면, 그것을 최대한 강조하고 모든 자원을 투입해 해결하려고 했다. 이러한 방식은 작은 문제를 지나치게 크게 다루게 되어 업무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모든 것이 중요해지고, 실제로는 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동시에 다루게 되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특히, 글로벌 제품을 개발하는 본사의 직원들을 당황스럽게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일본 시장의 중요성 등을 설명하며 ‘다름’을 이해시키려 하였으나 그럴수록 일본의 제품 출시에 적극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곤 했다.
나름 글로벌 리더로 미국, 유럽과 소통하며 아시아 여러 팀과 글로벌 기업과 제품의 전략을 맞춰야 하는 나로서는 일본 팀의 사고방식에 잦은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 여러 채널을 통한 대화와 일본의 직장문화에 관한 공부 등으로 하나씩 이해할 수 있게 된 몇 가지 일본 직장문화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일본어와 영어로 회의할 때의 차이이다. 일본 지사에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외국인 매니저와 영어를 잘하는 일본인 직원들이 함께 회의할 때는 언어에 따라 여러 차이가 생김을 느낄 수 있었다. 일본어로 회의를 진행하면 반대 의견이 있는 경우 완곡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강하고, 영어 회의에서는 더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질문에 대한 답변도 더 빠르게 이루어진다. 또한, 일본어 회의에서는 감정을 자제하고 진중한 분위기가 형성되지만, 영어로 진행하면 가벼운 유머도 섞이며 분위기가 더 자유로워진다. 회의의 결과를 내는 방식에서도 일본어 회의에서는 직속상관이나 참여자들의 동의를 신중하게 확인하며, 확실한 결정이 안 나는 경우도 많았고, 영어 회의에서는 각 책임자가 결정을 빠르게 내리고 회의 후 바로 실행에 옮기는 결과 지향적이었다. 회의의 언어에 따라 전체적인 회의의 분위기나,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도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의 직장문화가 글로벌 회사의 효율성과 속도에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이로 인한 갈등 때문에 에너지 소모도 컸다. 다시 정리하면, 일본어로 회의할 때는 신중함, 감정 자제, 팀워크 중심의 결정과 같은 특성이 강조되는 반면, 영어로 회의할 때는 직설적이고 효율적인 의사소통, 신속한 결정, 자유로운 분위기가 더 두드러진다. 이러한 차이는 서로의 가치의 다름으로 인한 것이므로 쉽게 변화되기 어렵다. 내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이런 상황에서의 외국인 리더는 일본 특유의 직장문화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이러한 차이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일본 직장문화와 글로벌 지침과의 완충 역할을 하며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선택해야만 글로벌 업무 환경에서 협업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일본 직장문화의 핵심인 ‘호렌소(ホウレンソウ)’이다. 일본에서는 직장 내 보고(報告 ほうこく), 연락(連絡 れんらく), 상담(相談 そうだん)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호렌소(報連相)’라는 독특하고 강력한 원칙이 있다. ‘호렌소’는 상사에게 신속하고 정직하게 상황을 보고하고, 필요할 경우 상의하는 습관을 뜻한다. 외국인 매니저로서 처음 일본 지사에서 이런 상황을 접했을 때, 이것이 지나치게 세세하게 보고하려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조직 내 상하 관계와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려는 일본 특유의 시스템이었으며, 상황을 파악하고 신뢰를 쌓는 방식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호렌소’ 항목을 통해 말 걸기 쉽지 않은 매니저와도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면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호렌소’도 대면 보고에서 시스템 기반의 디지털 보고 체계로 변화되고 있다. 정보 전달을 더욱 신속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직접적인 대화를 통한 ‘호렌소’의 기회가 줄면서, 상사와의 인간적인 교류도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직장문화가 점점 더 매뉴얼화 되어가면서 예측하지 못한 문제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소통을 통해 융통성 있게 대처하기 어려워져가는 것을 보며, 호렌소의 장점을 더욱 이해할 수 있었다.
셋째는, 세심하고 철저한 문제 해결 자세인 ‘카이젠(かいぜん 改善)’과 ‘품질 향상’이다. 일본 직장문화에서 문제를 철저하게 해결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는 일본의 종교적인 완벽 추구 문화나 장인정신에도 기인하나, 특히 경제성장기에 ‘카이젠’ 철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카이젠’은 작은 개선을 통해 점진적인 성장을 이루려는 접근법이고 토요타 생산 시스템이 이 접근법으로 유명하다. 또한 일본 사원들은 ‘품질 향상’의 기치 아래 서민문화와 고객 중심의 태도로 이를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경향이 있어, 일본 제품의 품질과 내구성에 자부심을 느끼곤 한다. 이는 집단적 책임감과도 연결된다. 모두 책임을 느끼니 작은 문제라도 큰 문제처럼 다루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효율성을 중시하는 글로벌 기업들은 일본에서 우선순위의 설정과 자원배분이 쉽지 않아 외국인 매니저와 일본팀과의 충돌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내 씁쓸한 경험으로 한 개인이나 기업이 일본사람들의 가치관을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로벌 경쟁에서 유연성은 부족하나, 일본 문화의 특수성을 이해하며 일본으로의 로컬 화 간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예를 든 세 가지 일본의 직장문화인, 글로벌 회사에서의 ‘언어’ 사용에 따른 업무 차이, ‘호렌소’, ‘카이젠’에 영향을 받은 완벽주의 등이 외국인을 당황하게 할 수 있다. 외국인 매니저는 처음에는 글로벌 기업의 업무처리 방식을 더 강조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나의 경험으로 볼 때도, 그런 시도는 큰 성과로 이어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결국 외국인은 점점 지쳐가며 일본 직장문화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만약 글로벌 기업이 일본 시장에서 성공하려 한다면 이런 일본 직장문화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일본 시장과 고객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에는 일본 시장에 더 많은 자원배분을 해야 하므로 모든 기업의 전략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일본 외의 글로벌 시장을 주요 목표로 삼는 기업에서는 일본의 고유한 문화가 경쟁력 약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최근 수십 년간 일본의 인터넷과 전자기기 분야가 글로벌 리더가 되지 못하는 원인을 설명하는 하나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직장문화는 여전히 일본인들에게는 직장에서의 화합과 조화로운 체계 유지를 위해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일본에 근무하러 오는 외국인들이 이러한 점들을 빨리 이해할수록 오해나 감정적인 에너지 소모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동서양 여러나라에서 문화적 적응을 하며 근무해왔던 내 경험과 생각으로는, 일본의 제품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든지 위에 언급한 직장문화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일본이 국제경쟁력을 포기하고 국내시장만 생각하는 갈라파고스화 되지 않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유연성의 증대이다. 일본의 직장문화에서 전통적 위계질서와 완벽주의적 태도는 효율성을 저하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민첩하고 유연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 일본 기업들은 전통적 접근을 완화하여 조직의 속도를 높이고, 글로벌 시장의 빠르게 변화하는 추세에 맞춰 더 빠르고 실용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
둘째, 임직원들을 글로벌 마인드셋으로 바꿔야 한다. 일본의 ‘호렌소’나 ‘카이젠’은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더 큰 도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협업을 강화하고, 다른 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 글로벌 마인드셋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일본 기업들은 다양한 문화와의 협업에 대한 열린 태도와 변화 관리 역량을 키워야 한다.
셋째, 혁신과 창의성을 촉진해야 한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세밀한 문제 해결에 강점을 지니고 제품의 질과 기능으로 한 때 세계적인 성공을 하였지만, 혁신과 창의성이 중요한 글로벌 시장에서는 기존의 방식에만 의존해서는 쉽지 않다. 일본 기업들은 모험적 접근과 창의적인 해결책을 추구하고, 다양한 의견과 유연한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정리하자면, 일본이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위계적 직장문화나 완벽주의적 접근에서 벗어나, 유연성과 효율성, 혁신을 중시하는 문화를 더 많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유의 분석과 혁신은 일본에서 이미 많이 제시되었고 이제는 대부분의 일본사람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노력도, 기업과 교육의 노력도 기존의 전통을 중시하는 일본사람들의 가치관을 단기간에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좀 더 확실하고 큰 충격적인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싱가포르처럼 공용어를 영어로 바꾼다면, 일본사람들의 마음 깊이 자리한 유교적 자세가 조금 다르게 열릴 수 있다고 본다. 일상의 언어를 통한 문화의 변화가 엄청난 효과를 만들 것으로 생각한다. 이전에도, 유니클로와 라쿠텐이 기업 차원에서 이런 시도를 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좀 더 큰 규모의 정책으로 변화를 시도해야만 21세기 AI시대에도 점점 더 갈라파고스화 되어 가는 듯한 일본이 글로벌 리더쉽을 보여줄 수 있는 직장문화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