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내항
1853년 페리제독이 4척의 구로후네(黑船)를 이끌고 들어온 사건으로서 이후 일본 개국의 시발점이 된다.
미일화친조약
페리 내항 이듬해인 1854년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체결된 일본 최초의 근대적 조약. 요코하마의 가나가와(神奈川)에서 체결되어 가나가와조약이라고도 부른다. 이로 인해 시모다(下田)와 하코다테(箱館)의 개항을 약속하면서 에도(江戸)막부의 쇄국체제가 사실상 붕괴되었다.
아편전쟁
19세기 중반에 청국과 영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을 말한다. 특히 1840-42년의 1차 전쟁과 청국의 패배는 그동안 전통질서 속에 있던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막말 위기의식의 조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일수호통상조약
미일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 일본이 미국과 맺은 조약으로, 치외법권의 인정과 관세자주권의 포기를 포함한 이른바 불평등조약이었다. 이후 일본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와도 같은 조건으로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안세이의 5개국 조약).
사쓰에이전쟁 (薩英戦争)
다이묘 행렬을 가로막은 영국인을 살해한 나마무기(生麦) 사건의 보복으로 1863년에 영국과 사쓰마번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이때의 패배는 존황양이를 주장했던 사쓰마번이 ‘양이’를 버리고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정봉환(大政奉還)
1867년 막부가 위양 받았던 정권을 원래대로 천황에게 돌려준 사건을 말한다. 막부의 완전한 폐지를 의미하지 않았지만 좁은 의미의 체제교체가 이루어졌다.
왕정복고(王政復古)
1868년 사쓰마번을 중심으로 한 토막파들에 의해 천황친정이 선언된 사건을 말한다. 이때 천황으로부터 에도막부의 폐지가 공식적으로 발령되었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0년대 말 일본의 근대화를 결정짓는 체제전환을 가져온 일련의 사건. 넓은 의미로는 막말의 토막(討幕)운동으로부터 천황제 메이지 정부 수립까지를, 좁은 의미로는 체제교체를 결정지은 ‘대정봉환(大政奉還)’과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가리킨다.
판적봉환(版籍奉還)
메이지 정부는 지방의 번주들이 토지와 백성을 조정에 반납하는 형태를 통해 번(藩)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력을 강화했는데, 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중앙집권화의 한 과정으로서 1869년에 실시됨.
폐번치현(廢藩置縣)
메이지 정부가 1871년 전국의 번(藩)을 폐하고 중앙의 통제를 받는 현(縣)을 설치한 정치제도 개혁을 일컫는다. 판적봉환과 함께 일본의 중앙집권화 정책을 상징한다.
이와쿠라 사절단
이와쿠라 도모미를 특명전권대사로 한 구미파견 사절단. 1871년 후반부터 거의 2년간에 걸쳐 서양의 근대적 산업시설과 금융제도, 정치제도, 군대, 교육 등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정한론(征韓論)
파병하여 조선을 정복하거나 조선에 정치체제 변혁을 압박한다는 주장을 일컫는다. 에도막부 말기와 메이지 초기에 일본정부의 안팎에서 논의되었으며, 메이지정부는 이를 둘러싸고 치열한 의견대립과 갈등 조정 과정을 겪었다.
군인칙유
교육칙어와 더불어 근대 일본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천황의 칙유. 1882년에 내려졌으며, 군인은 대원수인 자신의 손발이라는 점, 의리는 산보다 무겁고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는 점, 상관의 명은 자신의 명과 같다는 점 등이 강조되었다.
탈아론(脫亞論)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의 일간지『시사신보』1885년 3월 16일자에 게재한 사설제목. 여기에는 중국과 조선이라는 아시아의 나쁜 친구들과 절교해야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톈진조약
갑신정변 후 1885년에 청일 간에서 체결된 조약. 조선에서의 군대철수와 향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경우 통지할 것을 상호 약속하였다.
일본 제국헌법
1889년 2월에 공포되어, 1890년 11월에 시행된 근대 입헌주의에 기초한 일본의 헌법이다. 공식 명칭은 <대일본제국헌법>이며, 약칭해 제국헌법, 또는 메이지 헌법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일명 ‘평화헌법’이라고 불리는 전후 일본국 헌법과 대비시켜 구헌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평화헌법’으로 개정될 때까지 한번도 수정이나 개정되지 않았다.
교육칙어
1890년 일본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발표한 일종의 교육헌장. 천황중심의 교육을 통해 천황에 충성하는 ‘충량한‘ 신민을 기르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자유민권운동
메이지 초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확보하려 했던 자유주의 운동이자 정치적 저항운동. 국회개설을 통해 정치적 민주화를 도모했으나 번벌에 의해 지배되는 정부에 대항한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맞물려있었다. 따라서 몰락한 무사층과 유신 정부에서 소외된 세력들이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정치운동이기도 했다.
교육칙어(敎育勅語)
1890년 일본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발표한 일종의 교육헌장. 천황중심의 교육을 통해 천황에 충성하는 ‘충량한‘ 신민을 기르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만한(滿韓)교환론
일본과 러시아가 각축을 벌이던 과정에서 일본 측에서 나온 주장. 러시아에게 만주를 양보하고, 일본은 한국에 대한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겠다는 논의.
동학농민봉기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농민들이 합세하여 무장봉기한 사건. 진압에 나선 정부는 곤란을 겪자 청국에 출병요청을 했고, 이에 따라 일본도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청일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청일전쟁
1894년 동학농민봉기를 계기로 조선에 들어선 일본군이 조선왕궁을 점령, 인천 앞바다에서 중국과 교전에 들어감으로써 발생한 전쟁. 이 전쟁으로 일본은 조선을 둘러싼 중국과의 세력경쟁에서 승리를 거뒀으며 중화문명권에 결정적인 변동이 초래되었다.
시모노세키(下關) 조약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 체결된 강화조약. 청국이 조선의 도립을 인정하고 일본에 요동반도 및 대만을 할양하고 배상금 2억량을 지불한다는 내용이 규정되었다.
삼국간섭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영유하게 됨으로써 러시아의 남진정책은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이에 러시아가 중심이 되어 프랑스와 독일이 공동으로 일본에 랴오둥 반도 반환을 요구하게 된다.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부른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는 국가적 수모를 겪은 뒤 1898년에 요동반도에 위치하는 여순과 대련이 러시아에 의해 조차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조된 반러감정을 나타내는 슬로건으로 쓰여졌으며 일본은 군비확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의화단사건
청국에서 오랫동안 외세배척운동을 전개해온 의화단이 1900년에 베이징에 있는 외국공사관을 포위함으로써 시작된 사건. 청국정부는 당초 이를 지지하여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8개국의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는 사태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구미 열강과 함께 의화단운동을 진압하게 되었고, 러시아 또한 진압을 구실로 만주에 주둔하게 되었다.
영일동맹
1902년1월 30일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여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영국과 일본 양국이 체결한 동맹. 이 조약은 런던에서 조인되었으며, 일본이 러일전쟁으로 가는 길을 예비해주었다. 1905년8월 12일 개정·조인(제2차 영·일동맹)되었으며, 다시 1911년7월 개정·조인(제3차 영·일동맹)되었다.
러일전쟁
1904년 만주와 조선을 둘러싼 세력다툼으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 1902년의 영일동맹 성립 이후 러시아는 만주철병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곧 강경세력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일본 국내에서도 역시 강경론이 고조된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교섭이 진행되지만, 1904년 일본이 요동반도 여순항과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군함을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
1905년 러일전쟁의 결과 체결된 강화조약. 발틱함대와의 전투에 이겨 승기를 잡은 일본은 더 이상의 재정부담을 피하기 위해 미국에게 중재를 의뢰하게 된다. 조약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서의 우월권을 인정받았지만, 주요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사할린 북부의 절반을 반환하고 배상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양보를 감수해야 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일본 다이쇼기(1912~1926)에 정치,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 나타난 민주주의적 자유주의적 풍조나 운동을 총칭하는 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의 민본주의, 보통선거법의 제정 등이 상징적인 사례이다.
1차 세계대전
1914년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청년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가 암살된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1918년까지 유럽 전역을 휩쓴 세계 최초의 총력전. 동맹국(주도국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과 연합국(주도국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이 맞서 싸운 결과 동맹국의 패배로 끝났다.
베르사이유조약
1차 세계대전의 결과 1919년에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 체결된 강화조약. 강화화의를 주도한 것은 1917년에 중도 참전한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었으며, 독일의 영토축소, 군비제한, 배상의무, 해외식민지의 포기 등의 규정과 함께 국제연맹의 설립안이 포함되었다.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1차 세계대전 후 1920년에 윌슨의 제창에 따라 창설. 국제평화를 위협하는 침략행위를 연맹 회원국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여 집단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전쟁을 미리 억제한다는 집단안보 원칙에 기초한 국가 연합체이다.
대 중국 21개조 요구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5년 1월 유럽 각국이 중국문제에 개입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노려 일본이 중국정부에 한 요구. 일본인 고문을 고용하라는 등 주권 침해적 내용에 중국의 민족주의운동이 격화되었다.
시데하라 외교
1920년대~30년대 초반까지 주로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郎)가 외무대신을 맡았던 시기에 추구된 일본의 국제협조적 외교노선. 런던군축회의에서 군비축소조약에 조인하는 등 열강에 대해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중국에 대해서는 시장확대라는 경제이익만을 중시한다는 입장이었으나, 군부와의 마찰 끝에 만주사변 이후 철회되었다.
보통선거법
납세 제한을 폐지하고 25세 이상의 남성 모두에게 선거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으로 개정된 선거법.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한창이던 1925년에 제정되었다.
치안유지법
보통선거법과 거의 동시에 성립된 법령. 국체의 변혁을 꾀하는 운동을 처벌한다는 내용이 점차 확대 해석되면서 이른바 사상범을 탄압하는 합법적인 근거로 악용되었다.
세계 대공황
1929년 뉴욕 주식시장의 대폭락에 의해 촉발되어 전세계로 확대된 세계적 차원의 공황.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세계무역의 블록경제화가 진행되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가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다.
만주사변
관동군 주도하에 일본이 만주에서 일으킨 침략전쟁. 1931년 펑톈(奉天)의 북부 류탸오거우(柳條溝)에서 남만주철도의 선로가 폭파되었는데, 이는 만주에서 무력행사를 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일본의 관동군이 계획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관동군은 이를 중국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고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 대한 침략전쟁을 개시하고 만주국을 수립하였다.
15년 전쟁
1931년 만주사변으로부터 1945년 패전에 이르기까지 15년 동안에 걸쳐 행해진 일련의 전쟁. 즉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총칭하는 말이다.
5.15사건
1932년 5월 15일에 일어난 청년장교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사건. 이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수상이 살해당했고 다이쇼 이후 계속되던 정당내각이 실질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전향(轉向)
권력에 의해 강제되어 일어난 사상의 변화를 의미한다. 1933년 5월말 당시 일본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였던 사노 마나부(佐野學)와 나베야마 사다치카(鍋山貞親)의 전향성명이 나타난 이후 전향이 도미노처럼 일본사상계의 대세를 이루게 된다.
국체명징운동(國体明徵運動)
1935년 일본 열도 전역을 달아오르게 했던,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관설을 배격하면서 전개된 일련의 사상운동을 말한다.
2.26사건
1936년 2월 26일 ‘국가개조’를 부르짖던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로서, 무력에 의한 국내개혁을 기도한 사건. 이 사건은 외형적으로는 실패한 듯 보였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개조주의’라는 극우파의 혁신노선이 전국가적으로 추진된다.
국민정신 총동원운동
중일전쟁 직전에 성립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에서 추진한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국민의 정신(滅私奉公)을 촉진하는 운동. 조선에서는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이 결성됨으로써 구체화되었고 인적 물적 자원동원을 목적으로 한 전쟁협력이 조직화되었다.
중일전쟁
1937년 7월 베이징 루거우차오(盧溝橋)교외에서 일본이 군사행동을 도발함으로써 일으킨 중일간의 전쟁이다.
동아신질서
1938년 11월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에 의해 발표된 동아시아 정책이념. 대동아공영권의 전신이라 할 수 있지만 이때의 동아는 일본, 만주, 중국만을 포함했으며 이들 3국의 제휴를 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태평양전쟁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벌어진 전쟁. 초반에는 일본이 우세했으나 점차 밀리게 되어 결국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을 맺었다.
오키나와 전투
1945년 4월부터 6일까지 미국을 상대로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오키나와는 일본의 본토사수를 위해 마지막 격전지가 되었고
이때 약 15만명의 오키나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전투 말기에는 미군에게 몰린 일본군이 참호나 동굴에 숨어있던 민간인에게 총을 들이대고 그들을 내쫓기도 하였으며, 집단으로 옥쇄할 것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포츠담 선언
1945년 7월에 미국의 투루먼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이 일본의 항복 조건과 일본 점령지의 처리에 관하여 발표한 선언. “일본정부가 즉시 전 일본군대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지 않으면 일본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신속하고도 완전한 괴멸뿐.”
원폭투하
미국이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건을 말한다. 이로 인해 일본은 무조건항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고 이후에도 사회에 커다란 육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남겼다.
종전조서(終戰詔書)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히로히토가 직접 라디오를 통해 전쟁이 끝났음을 밝힌 조서. 흔히 ‘옥음(玉音)’방송이라고 불린다.
냉전
2차 대전 이후부터 동유럽 사회주의정권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까지 진행되었던 차가운 전쟁.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두 개의 이념으로 나눠진 진영 간에 군사, 경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했던 상황을 의미한다.
극동국제군사재판소/동경재판
1946년 5월 동경에 설치되어 GHQ에 의해 기소된 전쟁범죄 용의자들을 재판하였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해 전전의 지도자 7명이 A급 전범으로서 심판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다.
평화헌법
1946년 11월에 공포된 일본국 헌법을 지칭한다. 헌법의 제9조에서 ‘전쟁을 포기’하며 ‘전력을 소지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어 갖게 된 별칭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951년 9월 8일, 태평양전쟁의 전후처리와 점령의 종결을 결정한 강화조약. 한국전쟁을 통해 일본의 전략적 위치를 재확인한 미국의 의도가 다분히 반영된 것으로, 소련과 중국 등 이른바 공산진영을 제외한 단독강화로 이루어졌다.
미일안보조약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체결되던 날에 함께 성립된 안보조약으로, 일본은 미국에 대해 영토 내 군사기지를 제공할 것을, 미국은 일본의 방위를 책임질 것을 약속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은 미국의 안보우산과 자유무역체제 아래 경제성장에 주력할 수 있게 된다.
55년체제
1955년 일본에 성립된 정치체제로서 보수 여당인 자유민주당과 혁신 야당인 사회당이 이후 양대 정당체제로 자리 잡게 된다. 다만 형식적으로는 양당체제였지만 실제로는 이들의 세력비율은 항상 2:1로 보수적인 자유민주당이 우위에 있었다.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연립내각이 탄생되면서 동요되었고, 2009년의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압승하게 되면서 사실상 붕괴되는 운명을 겪게 된다.
안보투쟁
1959-60년에 일어난 미일안보조약개정 반대운동을 말한다. 60년 안보투쟁은 기존의 미군주둔을 인정한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상호 군사동맹적인 성격을 강화하려는 기시(岸信介)내각의 조약개정 움직임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쿠바 미사일 위기
1962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설치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소간의 핵전쟁 위기가 가장 고조된 사건을 말한다.
일본열도개조계획
1970년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내각에서 추진한 국가개발 정책구상을 말한다. 신칸센과 고속도로를 통해 전국적인 교통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지방에 대규모 공업지대를 형성하고 인구를 분산시킬 것을 목적과 내용으로 하고 있었지만, 땅과 주식투기가 성행함으로써 부동산 값과 물가의 폭등을 초래했다.
플라자 합의
1985년 9월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G5(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의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들이 모여 발표한 환율에 관한 합의를 가리킨다. 국제적인 정책협조를 통해 엔화의 평가절상과 달러화의 평가절하를 유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숙(自肅)
1988년 9월 쇼와천황의 위독이 보도됨과 함께 일본열도를 덮친 현상. 언론매체에서는 매일 천황의 상태를 보도하고 전국은 천황의 회복을 기원하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잃어버린 10년
일본에서 1991년의 거품경제 붕괴 이후 효과적인 정책이 실행되지 않은 채 경제침체를 겪게 된 상황을 일컫는 용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