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면서 왠지 모를 억압감을 느끼곤 한다. 옛 사람들도 어느 시대든 항상 억압감을 느꼈다. 그들은 그 시대 계층이나 행정 등에서의 물리적인 압박 외에도 종교적 윤리 전통이나 관습에 따른 인간관계 등 정신적인 압박이 있었다. 현대에는 자유와 민주주의 등으로 그런 압박이 사라진 듯하나, 학력이나 경력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도덕 윤리 등으로 압박이 한층 증대된 면도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은 자신이 정말로 자유롭지 못하고 무언가에 묶여 있다고 느낀다.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인간이 어떤 식으로 지배당하고 압박받아 왔는지를 이야기하며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 것을 ‘규율 권력‘(인간의 생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 生體權)이라고 하였다. 규율 권력이란 사람들이 위로부터 온갖 의미에서 규제를 받으며 정해진 틀 안에서만 생활하고 행동해야 하는 상태로 만드는 힘을 뜻한다. 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권력자와 정부이고 그들은 이 힘과 방법으로 현대적인 통치를 한다. 권력 체제는 사회적인 속박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내면에까지 손길을 뻗친다. 개개인의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까지도 컨트롤해서 자신들의 관리하에 두려고 한다. 구체적인 예 중 하나는 교과서 내용을 구석구석까지 검열함으로써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지식의 성향과 틀을 조절하는 일이다. 세세한 법제도를 통해서 윤리와 상식의 토대를 만들고 사람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 행동을 지배하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억압은 점차 세상의 풍조가 되어서 널리 퍼지고 어느새 당연한 상식이 되고 만다. 이것이야말로 권력의 침투이며 우리 삶에 미치는 악영향이다. 미셸 푸코는 니체주의자였기 때문에 이런 통치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덨다. 니체주의자란 니체의 팬이라는 뜻과 같은데 특히 푸코는 니체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니체는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가치관을 뿌리부터 의심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니체는 시적인 느낌을 주는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 후세에 이 충격적인 문장만 유명해지고 말았지만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 한 가지, 즉, ‘각자가 자기 나름의 가치를 창조하라’라는 것이다. 니체는 왜 각자가 자기 나름의 가치를 창조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을까? 만약 당신이 ‘세상의 모든 가치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다. 부자로 태어난 자가 가난하게 태어난 자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도 재미없는 그렇고 그런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의 가치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면 그 가치에 거푸집에 자신을 끼워 맞추며 살려는 태도를 취하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세상에는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이 아주 많다. 가능한 한 좋은 학교를 나와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남보다 풍족한 생활을 하고 보통 이상의 행복을 느끼며 사는 인생이 이른바 제대로 된 인간의 삶의 방식이며 많은 사람에게 찬미 받아 마땅한 삶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니체는 그런 삶의 방식의 반대한다. 그는 좀 더 위험한 인생을 좀 더 자신의 개성으로 빨갛게 물든 인생을 자신을 가장 생긴 넘치게 할 삶의 방식을 취하라라고 열렬히 주장한다. 니체는 왜 위험함과 동시에 이기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삶의 방식을 권하는 걸까? 그가 무책임하게 사람들을 선동하는 위험한 사람이기 때문일까 이런 까닭에 니체의 사상이 위험하다고 간주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 견해는 잘못되었다. 니체는 모두가 각자 자기 나름의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면서 항상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
본능과 욕망은 삶을 건강하게 만든다
당시 니체가 출간한 책인『반그리스도』라는 제목만으로 사람들은 니체가 자신들의 전통과 윤리를 자극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니체는 빈축을 샀고 무신론자 딱지가 붙게 되었습니다.하지만 니체는 실제로 기독교도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니체는 예수의 언동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예수에 대해서 그때까지 누구도 할 수 없었을 만큼 깊은 동정을 보냈습니다. 니체가 비판한 것은 신학자와 성직자들이 신약 성서를 이용해서 제멋대로 윤리 도덕을 만들고, 그것이야말로 진리라고 단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그가 비판한 것은 기독교의 신학과 거기에서 파생된 윤리 도덕입니다. 이는 당시 기독교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 사람들에게 널리 침투해 기독교 신자의 상식이자 기독교 세계의 상식이 되었습니다.
신학에서 탄생한 이 윤리 도덕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자유와 생기를 옭아매고 억압했습니다. 강한 자를 악하다고 치부하는 것 외에도 건강한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동물성이나 에너지까지도 모조리 좋지 않은 것으로 취급했지요. 니체가 기독교 도덕의 성욕 금지 등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더욱 거시적인 시점에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반그리스도』에서 “이 윤리 도덕은 진리라고 불리는 것이 우리 생에 가장 유해한 것인 양 취급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신학에서 탄생한 윤리 도덕은 하나같이 반인간적이고 반자연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니체가 기독교에 개인적인 원한이나 트라우마가 있어서 강한 어조로 기독교의 윤리를 공격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기독교에서 말하는 바를 따르면 인간의 생명력이 한없이 약해지기 때문에 이런 점에 대해 좋지 못하다고 말한 것뿐이지요. 니체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저해하는 모든 요소는 우리의 생을 손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란 기본적으로 본능을 말합니다. 투쟁에 승리하고,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마음이지요.
그런데 기독교의 윤리 도덕에 따르려면 이 본능을 억제하거나 부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니체의 생각은 건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윤리 도덕의 유효성을 머리로만 생각하지 않고, ‘정말로 살아 있는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지상에 사는 일에 공헌할 수 있을까?’를 중심에 놓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자세를 가진 니체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의 윤리 도덕은 너무도 공상적이고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도덕은 인간이 살기 위한 본능과 욕망의 많은 부분을 죄라고 단정하고, 인간은 그저 신의 은총을 바라고 기다리며 신의 영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며, 지금 직면해 있는 현실이 아닌 천국을 지향하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그대로 믿고 따르면 현실의 생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관념이라도 그것이 지금 사실로서 존재하는 우리의 생에 직접적으로 공헌하지 못하면 허무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니체는 칸트가 제창한 선도 무효하다고 말했습니다. 칸트가 제창한 선은 인격이 없는 선, 순수한 개념 그 자체인 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절대 개념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개념에 인간을 맞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개념을 맞춰야 합니다. 살아 있는 육체의 생활을 중심에 놓고, 이에 알맞은 윤리 도덕을 세우지 않는다면 오히려 인간의 생을 망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일단 현실의 생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 유효성을 따지는 것이 니체가 가진 생각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니체의 철학은 ‘생의 철학’이라고 불립니다. 그의 철학은 개념을 중점에 둔 것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그렇다면 니체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 걸까요? 그는 『반그리스도』에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이를 명확하게 드러냈습니다. 바로 ‘각 사람은 선을, 즉 자신만의 윤리 도덕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일종의 탈출을 향한 길입니다.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탈출일까요? 지금의 자신으로부터 탈출, 일상의 답답함으로부터 탈출, 왠지 모를 억압감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니체주의자였던 푸코가 이름 붙인 규율 권력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뚜렷한 주관 없이 수동적으로 살면 권력자의 생각대로 계속해서 지배를 당하게 된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자각하지 못한다. 그들은 보통 지배라고는 해도 그것은 정치나 행정상의 지배이며 내가 실제로 유린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으로서 나 자신은 항상 자유롭지 않은가라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지배당하고 관리 당하는 삶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지금까지처럼 세상 풍조에 물들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집에 와 관리를 당해온 대로 밖에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권력으로부터 집에 와 관리를 받는다. 아이는 겉으로는 부모의 양육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기 부모의 언동과 생활을 통해서 세상에 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세상을 만드는 것이 지금 여기에 있는 ‘권력 체제’이다. 이 체제는 법률과 제도를 만들어서 위법과 적법의 범위를 정한다. 그 가치관은 시민이 가지는 도덕관념의 모태가 되고 그 농도가 옅어진 것이 세상의 상식이 되며 전체적인 시대의 풍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이가 자라 학교에 들어가면 권력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교재로 학습하게 된다.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 뒤에도 권력의 지배와 관리망 안에서 일하게 된다. 개인의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의 지문이 끈끈하게 묻은 윤리관은 텔레비전 뉴스 등 미디어를 통해 우리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물들인다. 니체가 태어난 19세기까지 그 규율 권력은 주로 기독교에서 탄생한 윤리 도덕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교활하게 이혼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경제 윤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윤리를 지향하는 세계에서 선으로 간주하는 성공이란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고 남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결과로 보이는 숫자만이 의미 있는 것이며 수치화 할 수 없는 인간적인 것, 예를 들어 예술이나 인격과 사랑 개성 등은 하찮은 장식 정도로 치부된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살벌한 경쟁 세계에 완전히 몸을 담고 제대로 뛰어드는 편이 나을까? 만약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우리는 중무장을 하고 싸워야 한다.눈앞에 나타난 적을 차례로 해치우지 않으면 다음 순간에는 자신이 죽거나 패잔병이 되고 말테니까. 하지만 끝까지 싸우더라도 수중에 남는 것은 ‘허무’뿐일 것이다 디지털 게임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게임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끝판왕을 쓰러뜨렸을 때를 떠올려보자. 결국에는 한없는 허무만이 남는다.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정년이 되어서 회사를 떠난 사람도 같은 허물을 맛본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삶의 보람을 찾으려 하거나 제2의 인생으로 등산이나 취미생활 문화센터 안에 자신을 매몰시키려 한다. 무언가로 자신을 가득 채워야 할만큼 자기 안에 공허가 퍼져 있다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간의 기준에 따라 실패 없이 살아왔는데 그 대가는 어째서 한없는 허무일까? 그 이유는 명확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으로 살기보다는 세상에 맞춰 살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맞춰 살아왔다라는 말은 세상의 상식을 자신의 상식으로 삼고 세상에 윤리 도덕을 자신의 윤리 도덕으로 삼아 살아왔다는 뜻이다. 사실 이는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살고 있다 물론 이런 삶이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남들에게는 훌륭한 분별력을 가진 사회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마음 한편의 공허를 안게 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세상의 분주함으로 덮으며 스스로 눈속임을 하고 있었던 것 뿐이다. 만약 100% 자기 자신으로 살아왔다면 허무가 비집고 들어갈 틈 따위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입증할 훈장, 남들이 보내는 존경의 시선, 멋들어진 직함을 원하지 않는다. 자기답게 살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테니까.
그렇다면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건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흔히 자기 자신이란 지금 여기에 있는 자기를 뜻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옳지 않다 자기 자신이란 본능과 의지 그리고 능력의 가능성이 응축된 것으로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은 이를 모두 해방해 충분히 활동하게함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나 고양이 아기는 항상 자기 자신으로 산다. 계획이나 어떤 의도 없이 그저 천진하게 산다. 기쁨이나 웃음을 온몸으로 표현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들에게는 조금의 후회도 없다. 내일의 일은 물론이고 지금이 순간에 손익조차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물리적인 고통을 느끼지 않는 한 계속해서 기분좋게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누구의 제한도 받지 않고 자신의 본능과 의지와 능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근원적인 기쁨은 그 세 가지를 사용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사회생활의 규범이 있는 이상 우리는 본능대로 행동할 수가 없다. 의지를 발휘하는 일도 그렇게 자유롭지는 않다 법률 도덕 인습 전통 종교 문화 예절 체면 등이 우리를 사방에서 짓누른다. 우리는 끊임없이 옷차림과 표정 시선 자세와 태도까지 신경쓴다. 그런 우리 입장에서는 예술가나 작가 창작자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몸에 두르고 마음가는 대로 하루를 보내고 자유롭게 발언한다. 중요한 것은 그러면서도 창조적인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살 수 있는 이유는 모두 남다른 재능을 갖췄기 때문일까? 많은 사람이 나한테 재능만 있었더라면 하면서 자유인으로 불리는 이들을 부러워함과 동시에 재능은 유전적으로 타고난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의 재능은 피와는 관계가 없다. 그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은 그저 세상 사람들이 믿는 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그들은 세상에 흘러넘치는 규율 권력에서 탄생한 윤리 도덕과 사고방식, 가치관을 절대로 유효한 진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 밖에 일에 대해서도 결코 남의 의견을 듣고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에 만연한 온갖 윤리 도덕의 바깥에서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윤리 도덕이 결핍되어 있는 걸까? 그저 괴짜이거나 무법자일 뿐인걸까? 실제로는 그들 또한 윤리 도덕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은 세상에 있는 기성의 것이 아니라, 그 들 자신의 지성과 경험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자기 단련을 통해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기준이 특수하고 이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적이면서 보편적이다 그에 비하면 세간의 일반적인 윤리 도덕은 그 시대의 한정되어 있고 지역이나 문화의 틀 안에서만 통용되는 좁은 범위의 것이다. 창조적인 힘을 가진 사람의 윤리 도덕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예술가의 작품이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이해되고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반적인 윤리 도덕과 차이가 나는이 방식이 바로 남다른 재능으로 불리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윤리 도덕 하나하나가 기존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손수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즉 자유인들은 그야말로 가치를 창조해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예술가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업에 속한 비즈니스맨이나 일반 서민 중에서도 스스로 윤리 도덕을 창조한다는 의식 없이 자신의 규칙을 형성하면서 독자성이 강한 삶의 방식을 취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안일하게 남을 흉내 내지 않는다. 스스로 판단하고 인생을 살면서 직면하게 되는 문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등 확실하게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삶의 방식을 취한다. 이런 태도는 남의 눈에는 자아가 너무 강하다고 간주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자기 나름의 가치를 창조하려고 하지 않는 대부분 사람은 항상 이미 만들어진 것 가운데서 선택하는 인생을 산다. 세상이 정한 윤리와 도덕 아래서 학교를 선택하고 직장을 선택하고 배우자를 선택한다. 게다가 세상에는 안전하고 현명한 선택을 하기 위한 노하우를 담은 책이 넘쳐난다. 사람들이 자기계발서를 보며 공부하거나 편법을 사용하는 일도 당시에 문화와 풍조의 시점에서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획득하기 위함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의 인생은 수단을 선택하는데 소비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인생은 결국 정해진 메뉴에서 무언가를 고르는 일로만 전락하고 만다.
세상의 기준과 나의 기준을 분리하라
우리에게 인생의 매뉴얼을 슬며시 들이미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대의 권력을 중심으로 한 지배 체제입니다. 우리는 지배를 받아들이며 행동과 사고방식이 예상되는 범위 안에만 머무르는, 순종적이고 획일적인 시민 계층이 됩니다. 그리고 획일적인 시민이 많을수록 지배 체제는 행정을 쉽게 컨트롤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태는 언뜻 권력층이 시민을 보호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는 보호와 동시에 시민의 삶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다소 강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비유해보자면 물고기를 어항 안에서 죽을 때까지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드넓은 허무의 바다에 떠 있는 세계 안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대로 내버려 두는 일이기도 하지요. 시민들은 그 지배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내부에 있는 가치관과 윤리 도덕은 기성의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며,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도 아닙니다. 이는 결국 떨쳐버릴 수 없는 억압감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왜 억압감을 느끼는 걸까요? 바로 자기 삶의 방식을 스스로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는 아무리 서툴더라도 어른이 도와주는 것을 싫어합니다. 놀이조차도 스스로 컨트롤해야 기쁨이 생기지요. 자신의 힘을 이용하는 일이 삶을 사는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니체가 자주 말하는 ‘힘에의 의지 Der Wille zur Macht’라는 말의 다양한 의미 중 하나입니다.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는 종종 ‘권력에의 의지’로 번역되고는 하는데, 이는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권력이라고 하면 정치적 권력의 의미가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Macht’라는 독일어는 넓은 의미에서 ‘힘’을 가리킵니다. 니체는 인간은 자신의 힘을 사용하기를 원한다는 의미로 이런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원하는 대로 행하라. 그렇지만 그전에 스스로 의욕을 북돋는 자가 되어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실제로 행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내놓은 것을 소비하거나 처리하는 인생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목적지는 끝없는 허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되돌릴 수 없는 지점까지 가서야 ‘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후회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그때의 기분이나 욕망대로 행동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방종에 빠지거나 삶의 지향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위에서 강요하는 윤리 도덕이나 규범을 훌쩍 뛰어넘는 자신만의 규칙을 가지고, 그에 준하는 삶의 방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제 니체가 말한 “자신의 윤리 도덕을 스스로 발견하라”라는 말의 의미가 보이시나요? 지금 당장 허무가 입을 벌리고 있는 어둠의 심연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세요. 정해진 삶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을 수립하고, 독창적인 삶의 방식으로 진정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선악의 윤리를 비롯해 스스로 윤리 도덕과 삶의 규칙을 다시 창조해야 합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입니다. 마치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 재료로 사용될 채소를 일일이 기르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과 같지요. 매우 성가실 뿐 아니라 시간도 오래 걸릴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윤리 도덕에 따라 살면서 후회와 허무에 도달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요? 사실 니체가 존경한 시인 괴테도, 니체주의자였던 푸코도, 그 외 세계의 많은 예술가도 이를 실천해왔습니다. 그랬기에 대중 속에 파묻히는 일 없이 시대를 넘나드는 개성 있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겠지요.
니체 시대의 ‘초인’은 현재에는 ‘자기실현을 하는 사람’
니체가 전하는 지혜를 이렇게 표현해보면 어떨까요? 자신을 온전히 살리는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인생이라는 춤의 스텝 하나하나를 스스로 정하며 자신만의 안무를 짜야 한다고 말이지요. 니체는 그 일이 가능한 사람을 ‘초인 超人’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는 니체가 살았던 19세기까지의 이름입니다. 그로부터 반세기 정도의 세월이 흘렀고, 이 단어가 뜻하는 의미는 조금 바뀌었지요. 현재는 그런 이들을 자기실현을 하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도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죽은 철학자의 살아있는 인생수업>, 시라토리 하루히코, 지지엔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