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은 내가 자기들과 같은 견해일 때에만 내게 말할 권리를 준다.
♣ 지식인이란 모든 권력에게 있어서 ‘더러운 종족’에 속한다.
♣ 자신의 합리성을 선택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오히려 합리성의 근거를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근거가 결코 과학적으로 구성된 객관성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반대편에서는 지배를 의미할 뿐이다.
♣ 광기에 대한 지식은 결코 이 세계에 확신을 주지 못하며 오로지 그 광기의 작품들만이 이 세계를 설명해 줄 뿐이다.
♣ 나는 역사를 죽인 것이 아니라 철학자들의 역사를 죽인 것이다. 그렇다. 나는 정말로 그것을 죽이고 싶다.
♣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고, 나에게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강요하지 말라. 그것은 호적 관리의 도덕일 뿐이다. 그 도덕은 우리의 서류를 지배한다. 그러나 글을 쓸 때만은 우리를 제발 좀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 철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사유에 대한 비판 작업, 바로 그것이 아닐까?
♣ 사랑은 상대방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의 총계이다
실존 미학, 개인 윤리
니체와 푸코의 윤리의 공통점은 모두 개인 윤리를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사회는 사회구성원으로 갖춰야 할 능력과 덕성으로 개인에게 윤리를 요구하였고 특히 칸트의 보편 윤리는 개인의 윤리법칙을 보편화하여 정당성을 확보해야 함을 우선시하였다.
자신의 행동을 보편화하여 공동체 구성원이 누구나 그 행동을 한다고 가정할 때 해도 되는지 마는지를 결정한다. 따라서 칸트의 윤리는 개인의 독립된 윤리관을 인정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법적 테두리 안에서 개인의 윤리는 동일할 필요는 없다. 10년 전만해도 온 몸에 타투 문신을 한 개인은 사회에서 지탄받아야 할 인물이었지만 지금은 개인의 개성으로 존중받는다.
그 점에 지적을 하는 인물은 드물다. 그만큼 개인윤리가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다.
이런 변화를 예견한 듯 니체와 그의 영향을 받은 푸코는 일찍 개인윤리를 주장하였다.
특히 윤리관에 미적관념을 투입하여 독특한 해석을 하였다.
니체는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라는게 윤리의 기본 원칙이다. 모호할 수 있다. 자신을 아름답게 하라는 말이 무엇일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일상속에서 윤리관념과 미적관념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가령 선한 행동을 하는 인물을 보고 “넌 참 귀엽구나” “귀여운 구석이 있는 녀석이네” 등의 표현을 하였다.
윤리적으로 착하다 선하다 등의 표현을 아름다움의 관념으로 표현하는게 일상 속에 이미 있었다.
니체가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라고 하는건 선한 행동을 하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행동을 하라 등의 윤리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할 때 더 호소력이 있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현대사회가 이성보다 감성이 중요해진 시대에 윤리적 표현도 감성적으로 하려면 미적 표현으로 해야 설득력을 갖는다.
이런 니체의 윤리관을 더 나아가서 푸코는 창조적으로 살라고 요구한다.
창조적인건 어제와 다른 오늘의 삶을 사는 것이다.
어제의 내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오늘은 어제보다 나은 삶을 산다. 이게 아름다운 삶이며 아름다운 인간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미적 영역과 윤리적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두 영역이 하나였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인들에게 감성을 자극하는 미적 표현으로 윤리적 삶을 요구할 때 더 호소력이 있다.
계보학적 분석, 혹은 권력의 미시물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과 방법론은 오늘날에도 문학, 사회학, 정치철학 등 폭넓은 분야에서 연구되고 활용되고 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학자 중 하나로, 2위인 피에르 부르디외와 비교해봐도 독보적인 1위이다.
생애
1951년 푸코는 교수자격 시험에 합격한 후 루이 알튀세르의 추천으로 고등사범학교에서 심리학 강의를 하게 된다. 하지만 교수 경력을 쌓는 데에 관심을 그다지 가지지 않았던 푸코는 이후 스웨덴, 폴란드에서 프랑스 문화원의 직원으로 일했고, 독일 함부르크의 프랑스 문화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1966년에서 1968년까지는 튀니지의 튀니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연했다. 1967년 튀니지는 반정부 운동으로 들썩였고, 학생들의 노력에 감명받은 푸코는 법정에서 체포된 학생들의 증인으로 참석하는 등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68년 프랑스 파리로 돌아온 푸코는 혁명의 열기로 설립된 (파리 8대학의 전신인) 뱅센느 대학의 철학과 학과장으로 부임했고, 질 들뢰즈,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와 같은 당대의 유명 좌파 지식인들을 교수로 임명했다. 이후 1969년에는 파리 제8대학교 설립에 관여하였다.
이후에는 자신의 은사인 장 이폴리트의 후임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고, “사유 체계의 역사” 라고 자신이 이름붙인 강의를 진행했다. 1984년 6월 25일 파리 13구의 피티에살페트리에 병원에서 AIDS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사상
잠시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1951년에 탈당하였고 계몽주의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푸코는 이성을 통한 자유 획득이라는 개념에 반대하는데, 푸코는 이성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고 규제하며 계몽주의는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즉 현대 사회는 이성이 인간을 억압하는 곳이라 생각한다.[11][12]
푸코는 사회가 서로를 ‘통치’하며 자유를 억압하는 구조임을 주장하였는데, 특히 철학적 의미로서의 파놉티콘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는 현대 사회가 감시자가 있든 없든 감시 효과가 나타나는 파놉티콘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푸코는 우리 사회가 진짜로 파놉티콘처럼 어느 감시자에 의해 감시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푸코가 말하고자 한 것은 우리가 감시당하는 것 같은 효과 때문에 자유가 침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푸코는 특정한 감시자는 없으며 현대 사회는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형태라고 말한 바 있다.
이후 후기 사상에 접어들면 푸코는 자유주의 체제가 단순히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 생산에 관여하게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근대국가가 ‘지상적 신’으로 군림하던 고전주의 시대를 지나, 자유주의 체계가 그 자체로 인간 바깥에 있는 구조가 되는 시대에 접어들며 통치 합리성은 ‘자연스러운 순환’을 중시하게 변모한다. 이런 체제 아래에서는 시장이라고 하는 자유로운 체계를 순환시키기 위한 ‘자유의 생산’이 핵심이 된다. 푸코는 이에 대해 ‘통치성’이라는 용어로 접근하는데, 통치성은 명확한 개념은 아니지만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조직하려 하는 합리성의 뭉치 정도를 뜻한다. 자유주의 통치성은 시장을 ‘자연스러운 순환’의 일부로 파악하고, 사회를 시장의 자유라는 개념 아래에서 재조직했다. 이것은 권력에 대한 접근방식을 전환하는 관점으로, 권력을 억압적 개념이 아니라 생산적인 개념으로 본 것이다. 요컨대 푸코에게 권력은 단순히 사법적 처벌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상정되는 체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나가는데 필요한 장치들의 총체였다. 그리고 푸코의 계보학이 주목하는 지점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자유의 개념이 실제로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출현했다는 진실이다. 이후 20세기의 소위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유 대신에 경쟁을 중심으로 해서 사회를 조직하게 된다는 것이 아주 러프하게 요약한 푸코의 신자유주의 비판이다. 다시 말해 경쟁 그 자체를 자연적인 질서의 일부로 보고, 인간을 다윈주의적 경쟁 상황에 놓인 생물학적 존재로 파악하는 인식틀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1. 근대화에 대한 비판
여하튼 푸코의 작업은 쉽게 말해서 데카르트 이후로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던 ‘근대성’이라는 것이 사실은 역사적인 것임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푸코는 인간이 사회적 지배의 산물임을 고발한다. 즉, 푸코는 인간은 그 자체로 보면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지만 그것이 사회 속에서는 어떤 사회적 권력을 통해서 어떤 특정한 개인이 산출된다고 본다. 푸코는 그러한 사회적 권력에 의해 개인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사회적 권력이란 국가가 행사하는 권력이 아니라 개별적인 일상생활과 인간관계에서 관철되는 권력이다.
푸코가 분석하는 오늘날의 사회적 권력이 바로 근대성, 합리성이다.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는 근대 이후 이성적, 합리적 사고력이 표준적인 인간상으로 굳어지면서 광인은 치료의 대상으로 분류되었고, 그로부터 정상/비정상의 구분, 정신병원, 정신병리학 등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은 그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이어진다. 푸코는 우리의 담론에서 올바른 말과 잘못된 말을 구분하는 것에 주목하여 올바른 말, 즉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말에 진리의 권위를 부여하고 잘못된 말은 표준어를 규정함으로써 금지하거나 허위로 단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또한 학문적 체계를 정비함으로써 중요한 학문과 덜 중요한 학문을 구분하고, 이론과 응용을 나누게 되었다고 하며 담론과 지식에서의 과정에서의 이러한 과정이 이성의 권위로 사람들의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냈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푸코는 근대적 지식, 담론 체계가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그것이 원하는 특정한 방향의 인간상을 만들어냈다고 본다. 범죄자에 대한 대응 방식에 있어서도 푸코는 과거에는 복수, 형벌로 범죄인을 단죄했는데 근대 이후로는 범죄인을 감금하고 관찰하며 교화와 치료의 대상으로 보는 것으로 단지 그 방식이 바뀐 것일 뿐이지 이들에 대한 근본적인 지배는 변하지 않았음을 폭로한다.
《광기의 역사》에서 정신병자를 사회에서 배제, 관리하는 방법을 이야기했다면 《감시와 처벌》에서는 계몽주의가 모범적인 시민상을 어떻게 육성하였는지에 대해서도 나오는데 이러한 훈육방법에 담론이 개입되는 과정도 볼 만한 부분이다.
푸코는 이처럼 미시적인 주제에 대한 분석을 통해 현재의 제도와 생활 체계가 근대의 산물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던 근대성을 특정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탄생한 우연적 결과임을 드러내면서 푸코는 근대성에 대해 냉철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푸코의 역사철학적 작업을 학자들은 ‘계보학’, ‘고고학‘으로 부르기도 한다.
2. 고고학과 계보학
그러나 담론이나 권력을 일반적인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면 푸코를 이해하는데 있어 상당히 곤란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권력은 어떤 주체가 다른사람에게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가시적인 개념도 아니다. <성의 역사>의 역자 이규현의 경우에는 권력이란 ‘가정이나 일터 등 모든 위상의 사회에서 ‘복잡한 전략적 상황에 부여되는 이름’이며, 이에 따라 권력은 부모와 자녀, 의사와 환자, 교사와 학생, 군주와 신하 등의 세력관계의 총체에 등장하는 개념을 일컫는다’고 한다. 물론 권력 및 담론에 관한 정의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도 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애초에 푸코는 용어의 정의를 그렇게 명확하게 밝히며 서술하지는 않는 타입이다. 당연히 앞서 서술되었듯 에피스테메, 권력, 통치성 등 그의 개념이 하나로 환원되는 무언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도 그 혐의를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 사상의 의의와 철학사에서의 위치
형벌체계의 역사를 조망한 《감시와 처벌》에 이르러, 푸코는 근대의 본질적 속성이 언표구조나 담론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를 규율하도록 인도하는 복잡한 시스템에 있음을 논하며 분석의 지점을 담론에서 권력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즉 지층을 규정짓는 증거를 발견하려는 고고학적 시도를 넘어, 지층의 이면에 놓인 ‘지층화되지 않은 것’에 주목함으로써 지층이 지층화 될 수 있도록 인도했던 힘관계의 양상에 주목하는 계보학적 시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러한 시선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안전, 영토, 인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등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진행한 강의를 거치며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권력 자체를 특정 주체의 소유물이 아니라 개인의 신체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이고 복잡하게 펼쳐져 있는 사회의 관계망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효과’로 바라보게 되었다. 푸코 중기 사상의 핵심을 관통하는 통치성, 생명정치와 같은 개념은 ‘합리적 개인’이라는 매개를 통해 개별적 신체와 집합적 사회를 동시에 구성하고 안정적으로 지속시키는 근대성의 ‘생산적 능력’에 주목할 수 있게 하는 시선으로서 21세기 들어 재조명되며 폭발적인 반향을 얻었다.
권력과 근대성에 대한 포괄적 설명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푸코는 합리적으로 판단, 사고, 행동하는 주체가 비단 근대에 갑자기 등장한 계보학적 구성물이 아니라 서구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된다.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를 거치며 푸코는 ‘목자-양’의 관계로 표상되는 중세의 신학적 주체성과 근대의 자유주의적 주체가 실제로는 유사한 사유체계를 지니고 있음을 어렴풋이 파악했다. 이를 보다 상세히 분석하기 위해 푸코가 선택한 사례가 바로 섹슈얼리티 즉 성의 계보학적 역사이다(《성의 역사》). 여기서 푸코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방대한 사료를 통찰하며 신체가 배태하고 있는 성욕을 관리하는 방법의 계보학에 주목했다. 이를 통해 성욕이란 금지되거나 억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과 권력의 상호구성적 형성에 따라 특정한 방향(예를 들어 가족형성을 위한 수단)으로 배출되도록 촉진되어 왔음을 드러냈다. 특히 성욕을 통제하고 특정 방향으로의 배출을 인도하는 핵심 전략으로서 ‘이성에 의한 육체의 통치’, 즉 ‘자기통치’의 실천적 기예가 서구의 역사를 관통하며 이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체화에 대한 독창적인 시선은 신좌파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생에 걸쳐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바깥에서의 사유’를 끊임없이 추구했다는 점, 그 사유의 광범위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대, 근대성, 근대적 주체 자체에 대한 해석을 급진적으로 뒤집었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를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은 좋던 싫던, 긍정적이던 비판적이던 푸코의 영향 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푸코는 무엇보다도 의학이나 과학 지식의 분석에 국한되어오던 프랑스의 과학철학적 사유를 사회 전체를 해명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20세기 대륙철학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푸코의 기여는 근대를 역사발전의 산물이나 변증법적 진보의 결과물로 바라보던 종래의 시선에서 벗어나 지식-담론-권력-주체가 복잡한 관계망에서 서로를 생산하며 발생하는 ‘일시적’ 효과이자 구성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 있다.
푸코는 프랑스 과학철학을 과학에서 탈출시켜 세계에 대한 보편적 이론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이성과 합리성의 선험성을 강조했던 칸트의 철학을 전면에서 전복시켰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브루노 라투르가 ‘푸코에게서 배운 것이 별로 없다’라고 말한 것과 같이, 근래 주목받는 타르드–화이트헤드–들뢰즈–라투르 등의 사유를 이어받는 일원론적 철학자들에게푸코는 근대와 비근대의 이분법, 그리고 인간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20세기 철학자에 그친다. “19세기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점에서 푸코는 가장 완전한, 아마도 유일한 20세기의 철학자”라는 들뢰즈의 평은 푸코 철학의 사상사적 위치를 잘 함축하고 있다.
푸코 사상에 대한 철학적 비판
푸코는 “정신이상자”, “동성애자” 혹은 “감옥에 갇힌 자”들처럼 사회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에 대해 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적인 서양의 합리주의를 비판함으로써 푸코는 해체주의자들과 노선을 같이했다. 데리다처럼 푸코도 “타자”로 정의된 사람들을 옹호했다. 그러나 푸코의 정치적 헌신은 너무도 강렬했고 철학적 정당화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너무도 일관된 것이어서 그의 철학적 회의주의와 그의 실천적 헌신 간에는 명백한 긴장이 존재했다. 어떻게 회의주의자가 투쟁할 가치가 있는 좋은 대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결단의 문제라는 답변이 일관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단은 강자의 편을 들거나 약자의 편을 들거나 다 똑같은 결단일 수 있고, 스탈린주의나 히틀러 나치즘을 선택하는 결단일 수도 있다. 물론 푸코의 선택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군나르 시르베크ㆍ닐스 길리에 『서양철학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