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 뒤에 숨은 심리학 – 이영직

Luke Avatar
행동 뒤에 숨은 심리학 – 이영직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의 사람의 속은 모른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무형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사람의 마음처럼 속이기도, 착각하게 만들기도 쉬운 것도 없다. 이 역시 사람의 마음은 무형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은 정말로 어려우나, 어느 정도의 심리학 지식을 알고 있다면, 인간의 행동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는 힌트 정도는 얻을 수 있다.

인간의 판단

盲人摸象, 群盲撫象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뜻으로 부분만을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이름 – <열반경(涅槃經)>
인도의 경면왕이 맹인들에게 코끼리의 모습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맹인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맹인들로 하여금 코끼리를 만져보고 모습이 어떤지 말하도록 했는데,
상아를 만진 맹인은 ‘무’같다고 했고,
귀를 만진 맹인은 곡식을 까불때 쓰는 ‘키’ 같다고,
머리를 만진 맹인은 ‘돌’ 같다고,
코를 만진 맹인은 ‘절구통’ 같다고 했고,
다리를 만진 맹인은 ‘기둥’ 같다고,
배를 만진 맹인은 ‘장독’같다고,
꼬리를 만진 맹인은 ‘새끼줄’ 같다고 했다.
맹인들은 모두 자신이 경험한 일부를 전체로 확대해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여기서 코끼리는 붓다를 가리키며, 맹인들은 일반 다중을 의미한다. 보통 사람들이 부처님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의미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모든 것을 경험하고 나서 균형 잡힌 시각으로 사물을 봐야만 제대로 보인다. 인간의 눈과 귀와 머리는 믿을게 못된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진나라로 가던 도중에 양식이 떨어져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적이 있었다. 아끼는 수제자 ‘안회’가 겨우 쌀을 구해와서 밥을 지었다. 배가 고팠던 공자는 밥이 다 되었는지 궁금해서 부억을 들여다보다가 아내가 밥솥에 뚜껑을 열고 밥을 한 움큼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제자 가운데서도 도덕수양이 가장 잘되어 아끼는 안회였기 때문인데, 공자는 크게 실망해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안회가 밥이 다 되었다고 하자 공자가 말했다. ‘안회야, 내가 방금 꿈속에서 선친을 배웠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더구나’ 밥을 몰래 먹은 안회를 뉘우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안회는 곧장 무릎을 꿇고 말했다. ‘스승님의 밥으로는 제사를 지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뚜껑을 여는 순간 천장에서 흙덩어리가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자니 더럽고 버리자니 아까워 제가 그 부분을 먹었습니다’
공자는 안회를 잠시나마 의심한 것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워서 다른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못되는구나. 그리고 나는 나의 머리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너희는 보고들은 것이 꼭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명심하거라’눈과 귀와 머리는 믿을게 못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탈리아의 한 교수가 고안한 가상의 설문입니다.
여기 고위공직에 출마한 세 사람의 후보가 있다. 여러분은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세 후보에 관한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A 후보: 젊어서부터 술과 담배 마약을 했던 불량소년이었다. 숨겨둔 여자와 자식이 있었다 나중에는 다리가 불편해서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다.
B 후보: 어려서부터 말썽꾸러기 학생이었고 낙제생이었으며, 사관학교도 3수만에 들어갔다. 줄 담배를 피우고 술고래였으며 괴팍한 성격이어서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를 꺼렸다.
C 후보: 독실한 신자였고, 금욕주의자, 채식주의자였다.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으며, 애국심이 강해서 전쟁에 나가 훈장을 받기도 했다.
설문의 결과는 C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A는 루즈벨트, B는 처칠,  C는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애국적이며 도덕적이고 금욕적이라는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서 가장 바람직한 후보가 되었다. 한두 가지 사실만으로 전체를 인식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릇된 신념으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서 6천만명의 사상자를 낸 전쟁 주범이었다.
세상에 어리석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정보와 지식의 부족, 욕심으로 어리석은 판단을 한다. 인간의 그릇된 판단은 잘못된 프레임, 즉 편견, 욕심 때문에 일어난다. 기업가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단하여 기업을 망치고, 정치가들은 그릇된 신념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노자만족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다고 적고 있다.
한비자만족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라고 했다.
세상사 거의 모든 불행은 만족을 모르는 데에서 비롯되었는데, 공자에게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공자가 제자 안회에게 물었다. ‘안회야, 이리 오너라. 너는 집도 가난하고 지위도 낮은데, 어찌 벼슬을 하지 않느냐’. 안회가 대답했다. ‘저는 벼슬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 밖에 50이랑의 밭이 있어 죽은 먹을 수 있고, 성 안의 열이랑의 밭에는 뽕나무와 삼을 심어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으며, 거문고를 타며 즐길 수 있습니다. 또 선생님께 배운 도가 있어서 스스로 즐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벼슬이 원하지 않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너의 뜻이 참으로 훌륭하구나. 내가 듣기로 만족할 줄 알면 이익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스스로를 얻으면 재물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수행되면 지혜가 없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내가 이 말을 외운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너의 대답에 이 말이 실천되고 있음을 보았다. 너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나의 복이다’.

확진 편향과 기억

우리가 선택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내릴 때, 잘못된 선택으로 이끄는 가장 큰 요인은 우리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확증 편향 때문이다. 확증 편향은 자신의 신념이나 기대와 일치하는 정보는 쉽게 수용하지만, 신념과 어긋나는 정보는 그것이 아무리 객관적이고 올바른 정보라도 무시하거나 거부해 버리는 심리적 편향이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하면서 남의 말은 절대 안 듣는 똥고집에 말한다. 얼마나 인간은 변하는게 어려운가? 어떤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을 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이나 생각, 주장을 확인시켜 주거나, 확증해 주는 것으로 보이는 증거나 정보에 더 무게를 둔다. 그 뿐만 아니라, 그런 증거들을 더 잘 알아차리고, 더 잘 찾고, 더 활발하게 찾는다. 신문을 봐도, 서점에 가도, 그와 관련된 자료들만 유난히 눈에 잘 띄는 것이다. 이 무의식적 선택 편향인 확증 편향은 인간의 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해 준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며, 또 얼마나 편견이나 선입견을 고치기가 어려운가도 설명해준다.
이러한 확증 편향을 프레임 효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세계 안경을 쓰고 세계를 보는데 오직 그 안경으로 보이는 세상만 진실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는 절대 색안경을 끼고 있지 않으며, 맨눈으로 공정하게 사실만 보고 판단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 확진 편향은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숨어서 우리를 지배한다. 사사로운 일상생활에서부터, 넓게는 삶의 가치관이나 종교 정치적 판단과 선택에까지 깊게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확증 편향이 과도해지면 공동체의 삶 자체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한국에서 정치적 확증 편향의 문제는 심각하다. 한국의 정당들은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이 프레임 효과를 이용한다. 국가의 미래와 구체적인 정책을 둘러싼 생산적인 토론은 실종되고, 어리석은 색깔론과 이념 논쟁만 활활 타오른다. 언론들은 이런 싸움을 말리기는 커녕 오히려 앞장서서 부축인다. 이에 덩달아 미디어와 정당들이 주도하는 프레임에 갇힌 국민들까지 가세해서 인터넷에서까지 혼탁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상생의 정치는 사라지고, 증오와 불신을 부추기는 권력투쟁만 남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정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더 현명하고 객관적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으려면, 자기 속에 있는이 무의식적인 선택 편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의식의 명령에 복종하는 인간의 뇌

코끼리는 태어나면 다리의 쇠사슬을 묶어 기둥에 걸어두면서 기른다. 답답함을 벗어나기 위해 몇 번 시도해 보지만 곧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고는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다가 어른 코끼리가 되면 쇠사슬을 풀어놓는다. 그래도 코끼리는 여전히 쇠사슬에 묶여 있다. 쇠로 만든 사슬이 아니라, 마음의 쇠사슬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조정을 받으며 일생을 고단하게 살아간다.
이러한 마음의 쇠사슬을 우리는 인습이라고 부른다. 자기 스스로 설정한 한계에 스스로가 묶이는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주위 사람들의 가만히 살펴보면 거의 모두가 마음의 사슬에 갇혀 살고 있다.
신경과학자들은 인간의 의사결정 과정에 두 개의 시스템이 작동한다고 말한다. 의식과 무의식 두 가지이다. 의식은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 주는 계기판 같은 것으로, 의식 자체만으로 사람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여기에 반하는 무의식은 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다.
우리 몸에 수분이 부족하면 무의식은 물을 마시라고 명령한다. 임산부들은 종종 특이한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 닭발, 족발, 순대 등 평소에는 징그럽다며 쳐다보지도 않던 음식들을 찾곤 한다. 임산부의 영향에 부족한 성분을 찾고 있는 것이다. 
사랑도 거짓말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면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자기 날 사랑해?’. ‘물론이지’. ‘왜?’ 여기에서 많은 이유를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거짓말이다. 사랑은 성욕의 뿌리를 두고 있는 가면을 쓴 성욕이라는 것이다. 공자와 같은 고상한 철학자들은 사랑과 성욕을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그 뿌리는 같다. 우리 뇌에서 분비되는 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나 도파민 같은 쾌락호르몬이 우리의 뇌를 지배하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콩깍지가 쓰이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이유를 갖다 붙이는 탁월한 소설가이며 위대한 거짓말쟁이이다. 자신의 행동을 무의식의 명령인 줄을 미처 알지 못한다. 그리고는 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합리화한다. 무의식은 명령하고 의식은 합리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 구조를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적 편향, 즉, 확증 편향이라고 부른다. 
사랑종교는 닮은 점이 많다. 장애물이 많을수록 더욱 강렬하게 타오른다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 로미오와 줄리엣, 젊은 베르테르처럼 그 불같은 사랑의 장애물이 생길수록 오히려 감정은 더 격렬해지고 마침내는 목숨을 버리는 결단도 서슴지 않게 된다. 이 모두가 무의식의 명령인 것이다.

뇌가 거짓 기억을 만들어낸다.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한 소녀가 엄마와 함께 수영장에 갔다가 엄마가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물장난을 하느라 엄마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 30년이 지나 사람들이 사건 당일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곧 기억을 회복해서 그날의 광경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익사한 그녀의 어머니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녀의 삼촌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엘리자베스는 거짓 기억을 환상처럼 떠올렸던 것이다. 이 경우는 그녀가 거짓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뇌가 거짓 기억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거짓 증언으로 그녀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어서,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인지과학 교수가 되었다.
우리는 자신의 기억을 완벽하고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믿으면서 행동한다. 그러나 인지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으며 감정에 따라 경험과 기억이 달라진다라고 말한다. 자주 회상하는 기억일수록 내용은 끊임없이 각색된다. 우리의 감정이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억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진처럼 박제된 기억은 없다. 사람들은 그때 기억을 사진처럼 명확하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기억이란 끊임없이 편집되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추억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기억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하나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시킨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점점 더 사실처럼 굳어진다. 우리는 흔히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이들은
뛰어난 거짓말쟁이이다. 의식적으로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뇌가 그럴싸한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아이는 그것을 사실처럼 믿는다는 것이다. 엄마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형이 때렸다고 하는 등의 거짓말이다. 
기억은 기록이 아닌 해석이다. 텍사스 베일러 대학 찰스 위버교수는 2001년 9월 11일에 있었던 911 테러에 대해서 사람들의 인식을 물었을 때 그때를 회상하면서 선명한 기억이라고 증언한 내용이 전혀 사실이 아니더라는 결과를 발표했다. 한 실험에서는 사람들에게 유령들의 전쟁이라는 미국 원주민 전설을 읽게 한 뒤에 몇 년에 걸쳐 다시 떠올리게 하는 실험을 했다. 그랬을 때 전반적인 이야기의 골자는 맞지만 나머지 디테일한 부분은 그 사람들에게 친숙한 기억으로 각색되어 있었다.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라는 것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도 착각 덕분이라고 한다. 콜럼버스는 지구의 둘레를 거의 정확하게 계산했던 에라토스 테네스의 계산이 틀렸다고 생각해서, 에라토스 테네스의 측정값보다 반의 반 정도로 작게 지구 둘레를 계산했다. 그에 따르면, 지구의 반지름은 약 400k로서 시속 3노트로 항해하면 한 달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동방이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대서양을 건너면 아메리카 대륙이 있고. 아메리카 대륙을 넘으면 대서양보다 더 넓은 태평양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항해해서 동방에 이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착각은 때로 위대한 성취자이기도 하다. 

행동 경제학

미국의 한 자선 단체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자문해 줄 변호사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비영리 단체라 사례는 시간당 30달러밖에 지급할 수 없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그런 조건에 선뜻 나서는 변호사는 한 명도 없었다. 이에 고민을 거듭한 단체장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돈이 아닌 명예를 치켜세워 주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광고를 했다. 

“이 일은 오직 명예직일 뿐 봉사에 대한 사례는 없습니다.”

그러자 지원자가 몰려들었다. 시간당 30달러 를 받으면 C급 변호사 취급을 받지만 비영리 단체의 명예직 변호사라고 하면 A급 변호사가 되는 것이다. 이를 경제학적으로는 해석이 안 되지만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30를 받아서 C급 변호사가 되느니 차라리 무보수로 일하면서 A급 변호사가 되는 게 낫다는 것이다. 아니면 자선단체 변호사임을 내세워 더 큰 사건을 맡을 기회도 생길지 모를 일이다. 또는 명성을 얻어 정계로 진출할 수도 있다.

이처럼 경제 행위도 비경제적인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즉 사람은 계산기만 두들기며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합리적인 인간의 경제 행위

 자본주의의 대전제는 인간의 이기심과 그에 따른 합리적인 행동이다. 자본주의 이론을 탄생시킨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좇아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면 보이지 않는 선에 의해 시장 질서가 유지되고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라고 썼다. 상품의 효용 가치와 가격을 비교하여 효용 가치가 더 높을 때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현실을 되돌아볼 때 과연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인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인간이 합리적인 소비 주체라는 애덤 스미스의 이론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비합리적인 소비 행동을 설명하기 가 점점 더 어렵게 된 것이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상품들이 잘 팔리고 명품은 가격이 비쌀수록 잘 팔린다. 우리나라의 명품 열정은 이제 세계적인 명품 기업들이 노리는 큰 시장이 되었다.

20대 여성이면 명품 하나쯤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한 아르바이트 포털사이트에서 대학생 131 명을 대상으로 명품에 관한 의견을 조사했다. 결과는 응답자 3명 중 1명 이상은 한 점 이상의 명품을 가지고 있었다. 나아가 아르바이트 생들의 30% 이상이 명품 구매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응답했다. 바야흐로 우리나라는 명품 공화국이다. 명동이나 강남 거리를 가면 3초, 5초 단위로 명품 가방이 지나간다. 사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경제 행동이나 선택은 당연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경쟁 행동뿐 아니라 인간의 거의 모든 행동이 이기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진다 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소비자를 합리적인 경제 주체로 가정해서는 풀릴 일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오직 합리적인 판단 하에 행동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배우자를 고를 때도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은 결혼에 대해 나름 합리적으로 접근했던 것 같다. 결혼하는 게 좋으냐 독신으로 사는 게 좋으냐 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고 있다. 물론 결혼을 하면 나쁜 점도 많다. 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으며 의무적으로 돈을 벌어야 하고 전원생활도 즐길 수 없다. 그러나 장점도 많다. 나이 들어서 주름진 얼굴로 친구도 없이 비틀거리며 혼자 사는 것보다는 동반자인 아내가 옆에 있고, 음악이 있고, 여자의 잡담도 재미있지 않은가? 다윈은 항목마다 가중치를 부여하여 장단점을 비교하여 결혼하는 게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합리적 접근 덕분인지 그는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둘 정도로 다복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접근하지는 않는다.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가정한 것 역시 부분적인 진리일 뿐이다.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삯바느질이나 행상을 해서 모은 전재산을 장학금이나 혹은 자신보다 못한 이웃을 위해 사달라며 쾌척하는 할머니들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실린다. 정작 자신은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모은 돈이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라는 가정하에서 보면 이들의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할머니들은 그래도 젊음이 남아 있을 때 자신을 위해 좋은 옷도 입고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드시고 했어야 했다. 이것이 진정한 이기주의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인지적 오류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은 프린스턴 대학 대니얼 카너먼 교수에게 돌아갔다. 그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심리학자였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의 공로는 기존 경제학의 이론적 기반인 인간의 합리성 가설을 뒤 업는 데 있다. 인간을 이기적이고도 합리적인 존재라고 가정한 경제학의 전제가 틀렸다는 주장이었다. 인간의 경제 행위는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카너먼 교수는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그리 합리적이지 않으며 다분히 편의적이고 즉흥적이며 충동적이라고 주장했다. 또 아무리 인간이 합리적이라 할지라도 불확실한 미래를 예측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합리적인 사고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편향된 사고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고 주장했다.

카너먼은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당시 미국 최고의 투자 금융회사 CEO의 사례를 들었다. 그 CEO는 모터쇼에 갔다가 포드 자동차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포드 자동차를 좋아하여 포드 주식 수천만 달러를 사들였다. 단지 포드 자동차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 하나였다. 카너먼 교수는 행동경제학에서 인간이 재화에서 추구하는 것은 재화의 효용가치가 아니라 심리적 가치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비쌀수록 잘 팔리는 명품의 존재를 설명할 길이 없다. 고전적인 경제학자들이 인간은 효용 가치를 추구하는 합리적인 존재로 보았으나, 카너먼과 같은 행동 경제학자들은 인간이 온전한 이성으로 자신의 행위를 결정짓지 않는다 고 말한다. 오히려 인간은 감정에 치우친 결정을 하며 오류 투성이 일 수 있다. 불확실성 속에서 내려지는 인간의 판단과 의사 결정은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란 입수할 수 있는 모든 데이터를 분석 평가하여 내리는 결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늘 무의식과 충돌한다. 1970년대 카너먼 교수는 동료 아모스 트버스키와 함께 불확실한 상황과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판단과 의사결정에 관한 지배적인 경제 이론인 기대 효용 이론의 전제, 즉 인간의 합리적 판단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여기서 나온 결론은 인지적 오류가 합리적 의사결정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판단을 내릴 때 확률이나 효용 극대화 이론을 동원하여 복잡한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 법칙에 비추어 어림짐작과 같은 지름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런 지름길은 대개 인지적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끼리끼리 심리

사람들은 유사성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반긴다. 기차에서 만난 사람끼리 이야기를 트는 것을 보면 성씨를 물은 다음에는 다시 본관을 묻는다. 아니면 고향을 묻는다. 이렇게 해서 공통점이나 유사성이 발견되면 조금씩 친해진다. 여기다가 군이나 사회생활에서 일치하는 부분까지 있으면 금새 가까워진다. 중년의 이른 남자들은 같은 군출신의 후배를 만나면 오랜 친구처럼 반긴다. 해병대의 경우가 가장 심한 것 같다. 유사점, 공통점이 이들의 유대관계를 이어주는 고리인 셈이다.

유사성 효과

타인과의 공통점으로 나를 확인한다. 남녀가 처음 만날 때에도 취미가 같거나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으면 쉽게 친해진다. 면접관의 심리도 마찬가지이다. 지원자의 출신 학교 고향 취미 등이 일치할 경우에는 자신도 모르게 더 높은 점수를 주게 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을 유사성 효과라고 한다. 페이스북에 성공 요인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페이스북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 영화, 책, 취미 등을 선택하면 자신과 일치하는 항목이 많은 회원을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다. 서로 친구가 되어 보라는 제안인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취미, 경제적 능력, 학력 등에서 유사성이 발견되면 급격히 가까워진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출신 지역이나 정치적인 성향도 중요한 항목 중에 하나이다. 이러한 심리적인 상태를 쉽게는 유유상종으로 풀 수 있다. 유사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경험을 공유할 수 있고, 화제거리도 풍부해지면서 쉽게 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학적으로는 조금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인류는 애초에 산자락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부족 생활을 시작하면서 모든 문화와 가치관을 공유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외부 부족과의 갈등이 있을수록 내부적인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해왔다. 그래서 외부 사람의 만나면 우리 편인지 아닌지를 먼저 따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심리적인 해석으로는 나르시시즘에서 찾고 있다. 모든 인간은 외로움이라는 굴레에 매여 있는 나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많은 사람이 부대끼는 사회라도 인간관계는 한정되어 있으며 혼자만의 감옥 위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상황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끊임없이 나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즉 나와 공통점이 있는 타인으로부터 나를 확인한다. 공통점이 많은 두 사람은 서로가 존재의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좀 웃기는 이야기지만, 어느 기업의 면접에서는 특정 지역 사투리를 써야만 합격한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이다. 유사성의 위력을 말해주는 에피소드이다. 여성의 경우에는 아버지와 출신학교가 같다거나 닮은 점이 많은 남성에게 이끌리게 되는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미국 텍사스주의 샘 휴스턴 대학에서 재밌는 실험을 했다. 이름의 유사성이 미치는 영향을 탐색하는 실험이었는데, 설문에 작성해서 받는 사람의 이름과 흡사한 이름으로 설문을 보냈을 때와 상의한 이름으로 보냈을 경우에 반응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랬을 때 비슷한 느낌의 이름으로 발송된 설문의 회신율이 월등하게 높았다. 
헤어짐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친밀감을 느끼던 사람이지만 어느 순간 상대방에게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성향을 발견하게 되면, 급격하게 친밀도가 낮아진다. 해병대 이야기로 꽃을 피우던 중에 어느 한 사람의 정치적 성향이 나와 정반대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멀어지게 된다. 우리나라처럼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치열한 나라에서는 정치적 성향 또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이다. 

고슴도치 딜레마

고슴도치 딜레마는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제안한 개념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얼어붙은 땅에 버려진 고슴도치에 비유하고 있다. 고슴도치들은 온기를 찾아 서로를 가까이 하려고 해보지만 너무 가까이 하게 되면 상대의 가시에 찔리게 되고, 너무 멀리하면 온기가 그리운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 하다가 찾아낸 방법이 가시가 없는 머리를 맞대고 어우러진다. 이처럼 인간의 독립성과 타인과의 관계 사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내놓은 개념이다. 그래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인간관계의 정답이다. 일부 학자들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쇼펜하우어가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내놓은 개념이라고 주장하지만, 누군가와의 관계를 맺고 싶지만 인간 본성이 가지고 있는 가시로 인해서 서로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지도 않게

어느 유학자는 인간이 예를 발명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한다. 서로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 예라는 것이다. 서로가 예를 잘 지키면,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서 적당한 온기를 나눌 수 있다. 현실의 세계에서 누구나 다른 누군가를 가까이 하려고 한다. 혼자서는 너무 외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와서 이런저런 간섭을 시작하면 가시를 세우게 된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이를 심리학 분야로 확장해서 부부, 가족, 친척, 친구 등 모든 인간관계에는 가시 곧 혐오와 질투와 적대감이 동시에 숨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적대감이 없는 사이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나르시시즘이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경우이다. 그는 10년 동안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참모들을 2년 이상 같은 자리에 두지 않았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고도 한다. 같은 참모라도 자리가 바뀌면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더라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또 다른 측면이다.
중국의 고사에 불과근 불가원이라는 고사가 있다. 인간관계는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리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관계는 마치 뜨거운 난로와도 같습니다 너무 가까이 가면 뜨거워서 죽고 너무 멀면 얼어서 죽는다.

타인의 온기는 즐기되 간섭은 싫다.

오나라를 무너뜨리고 승자가 된 월나라 왕 구천에게는 두 명의 충직한 신하가 있었다. 범려와 문종이었다. 두 사람 모두 오나라를 무너뜨리고 월나라를 세운 1등 공신들이었다. 전쟁에서 이긴 월나라는 승전 축하연을 열었는데, 축하연에서 대신들이 범려와 문종의 공을 칭송하자 구천의 얼굴색이 바뀌었다. 이것을 본 범려는 문종을 찾아가서 말했다. ‘무릇 월왕 구천은 불가근 불가원의 인물이요. 즉 어려움을 함께 할 수는 있어도 영광을 함께 누릴 수는 없는 인물이요. 만일 그대가 구천의 곁에 가까이 머무른다면 필시 그에게 죽임을 당할거요. 그러니 어서 이 왕궁을 떠나 그대의 살길이 도모하시오’. 범려는 혼자서 월나라를 떠났지만, 문종은 꾸물거리다가 구천이 내린 칼로 자결해야 했다. 일설에 의하면, 범려는 절세의 미인 서시와 함께 나룻배를 타고 멀리 떠났다고 한다. 범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스승 귀곡자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귀곡자는 천문 지리에 밝아서 범려에게 세상에 이치를 가르쳐 주었다. 모든 것은 정점의 이르면 위험에 처하게 된다라는 것이 귀곡자의 가르침이었다. 이것이 명리학의 기주가 되었다. 
한나라를 세운 1등 공신은 장량 한신이었다. 한나라를 세운 장량은 자신의 역할이 다했음을 알고 깊은 산중으로 숨어 들어 일가를 이루었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한신은 유방 근처를 서성이다가 죽고 말았다. 장량이 식솔들을 데리고 숨어든 곳이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장가계다. 장씨 후손들이 살았다는 의미다.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지도 않게. 말은 쉽지만 참으로 실천이 어려운 모양이다. 근래에 들어서 독신이나 1인 가구가 증가하는 것도 고슴도치 딜레마로 설명할 수 있을 듯 하다. 남과 어느 정도는 가까이 하면서 타인의 운기를 즐기되 남의 간섭은 받기 싫다라는 심리적 상태 말이다.
시인 조지아 오키프자신의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사람은 모두 선인장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가시처럼 몸에 박아서 다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선인장 말이다.

엉터리 논리학과 패러다임 시프트

논리학의 백미로 꼽히는 연역법이나 귀납법 또한 오류의 가능성은 언제든 가지고 있다. 18세기의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귀납법의 오류 가능성을 처음 제기한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예를 들고 있다. 농부가 매일 아침 칠면조에게 먹이를 준다. 이것이 반복되면 칠면조는 사람을 절대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고 고마운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그 믿음이 영원히 진리일까? 아니다. 11월 추수감사절에 식탁에 요리로 만들어 지기 전까지만 진리인 것이다. 연역적 논리 구조는 단 하나라도 예외가 발견되는 순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모든 백조는 희다. A는 백조다. B도 백조다. C도 백조다. 따라서 a, b, c는 모두 흰 색깔이다. 그러나 17세기 호주에서 검은 백조가 발견되었다. 호주로 이주한 영국인들이 발견한 것이었다. 확률이 아주 낮기는 하지만 확률이 존재하는 한 언젠가는 나타나는 현상을 ‘블랙스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2008년의 금융위기와 같은 경우다.

1910년 독일의 독일의 기상학자이자 지구물리학자인 알프레트 베게너는 찢어진 세계지도를 맞춰 보다가 깜짝 놀랐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동쪽 해안선과 아프리카 대륙의 서쪽 해안선이 정확하게 하나로 맞물리는 것이었다.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은 아주 먼 옛날에 하나의 대륙이었다는 이야기다. 이에 의하면 지구의 각 대륙이 거대한 판 위에 얹혀 있으며 이들이 끊임없이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여러 대륙이 커다란 초대륙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그 후에 갈라지면서 지금의 5대양 6 대륙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베게너는 오랜 지질 시대를 통해 대륙이 천천히 이동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거의 모든 지질학자로부터 부정되고 외면되었다. 그의 이론은 수십 년간 사장되었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 판구조론의 일부로 부활했다. 21 세기 들어 대기 순환을 연구하기 위해 세 차례나 그린란드를 방문했던 그는 1930년 마지막 탐사에서 사망했다.

과학사를 보면 늘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여 기존의 이론을 뒤집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정설로 인정받기에 까지는 많은 세월이 걸린다. 과학 혁명의 구조를 쓴 토마스 쿤은 이런 형태의 발전을 ‘패러다임 시프트’라고 명명했다. 패러다임 시프트 paradigm shift, 사물과 세상을 보는 관점을 달리한다는 의미다. 날마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태양의 지구의 둘레를 돈다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진실은 지구가 자전하면서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것이었다. 지구가 돈다는 사실이 진리로 인정받기까지는 200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은하계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이론이 등장하여 정설로 굳어질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토마스 쿤은 모든 과학 이론은 잠정적이라고 말한다.

고대 그리스나 중세 사람들이 천동설을 의심 없이 믿었다면 틀린 것일까. 아니다. 당시엔 천동설이 옳았고 지금은 지동설이 옳다는 것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로 이어지는 천동설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으로 이어지는 지동설에 밀려났지만, 다음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새로운 이론에 의해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진리는 잠정적이라고 말한다. 뉴튼의 운동법칙은 아인슈타인에 의해 상대적인 것으로 축소되었고, 상대성 이론 또한 양자역학에 의해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상대성 이론은 빛이 다니는 우주공간에 적용되는 이론이고, 뉴튼의 이론은 지구 위에 물체 그리고 양자역학은 미시 세계에 적용되는 이론인 것이다. 

진리는 아이들처럼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에서 나온다. 토마스 쿤은 말한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견하는 사람은 아주 젊거나 아니면 그 분야에 아주 생소한 사람들이다. 한 분야에 오랫동안 몸담은 사람들은 이미 이전의 이론에 익숙해졌기에 오류를 깨닫기 어렵다는 의미다. 그러나 아마추어들은 고정관념이 없기에 기발한 상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어리석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정보와 지식의 부족, 욕심으로 어리석은 판단을 한다. 인간의 그릇된 판단은 잘못된 프레임, 아집, 편견, 욕심 때문에 일어난다. 기업가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단하기에 기업을 망치고, 정치가들은 그릇된 신념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결정 장애

‘결정 장애’라는 용어는 저널리스트 올리버 예게스가 쓴 ‘결정 장애 세대’에서 처음 사용했다. 1980년대 태어나 19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젊은 층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그들에게는 확신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도 maybe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결정장애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세대들은 어떤 물음에도 분명한 대답을 잘하지 못한다, 글쎄, 아마도, 그런 것 같아와 같은 모호한 말로 대답을 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곳에 정착하지도 못하고 한 가지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도 못한다.

기성세대는 이들에 대해 나약하다, 우유부단하다,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하지만 예게스는 개개인의 나약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급격한 사회변화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가 초고속으로 디지털화되면서 선택의 범위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기 때문에 무언가를 결정하는 일이 그만큼 더 어려워졌다. 선택의 옵션이 많으면 오히려 결정에 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전 세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뛰어나다. 인터넷 매체를 비롯한 각종 소셜 미디어를 통해 거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검색할 수 있다.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 니콜라스 카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무능해진다‘면서 그 이유로 너무 많은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어, 그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도외시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소위 원리를 깨닫는 데 필요한 학습기간이 없다는 이야기다. 디지털 기술의 편리함 뒤에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디지털 시대, 그것이 아마도에 해당하는 메이비 세대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결정 장애 핵심 감정은 불안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다가오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곧 결정에 대한 두려움은 결과에 대한 책임의 두려움이다.

햄릿 증후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사람의 스타일을 크게 둘로 나눈다면 햄릿형돈키호테형이 있다. 햄릿은 이럴까 저럴까 생각이 너무 많아서 행동이 일어나지 않고, 돈키호테는 생각도 하기 전에 행동부터 하는 스타일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서 햄릿은 이렇게 말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의 아버지 엘시노아 국왕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자 삼촌인 클로디어스가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곧 어머니 거트루드는 새로운 왕과 재혼한다. 시동생과 결혼을 한 것이다. 햄릿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이 삼촌과 어머니가 공모한 범죄로 보이지만 물증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선왕인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자신을 죽인 클로디어스에게 복수를 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기구한 운명의 햄릿은 내적인 갈등을 이렇게 독백으로 풀고 있다.

“기구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도 죽은 듯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제왕과 싸워야 하는가? 죽는 건 그저 잠자는 것일 뿐, 잠들면 마음의 고통과 육신에 따라붙는 무수한 고통은 사라지는가. 죽음이야 말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결말이 아닌가. 그저 칼 한 자루면 모든 것을 깨끗이 끝낼 수 있는데…”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남아 현재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결국 분별심은 우리를 겁쟁이로 만든다. 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하는 현상을 심리학 용어로 햄릿 증후군, 혹은 결정 장애라고 부른다. 햄린 증후군의 원인으로는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이 있다. 부모에게 의존하는 수동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일수록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하는 성격이 될 수 있다. 대학 졸업 후에도 부모에게 의지하는 부분, 정치에 대한 냉소 등의 그것이다.

온라인 기술의 발달도 햄릿 증후군의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인터넷으로 대상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오히려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소비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대량생산으로 인해 소비자의 선택 가능성이 넓어진 것도 소비자의 햄릿 증후군과 연관이 있다. 정해진 비용 내에서 기회비용을 줄이기 위해 고민하다 보면 선택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부모의 과도한 간섭이 오히려 결정 장애 세대를 만든다는 지적이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초등학생처럼 부모의 간섭을 받는 대학생이 많다. 대학 상담소에는 부모가 너무 간섭해서 힘들다는 대학생들의 고민이 쏟아진다. 대학생이 된 자녀 주위를 헬리콥터처럼 빙빙 돌면서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헬리콥터 부모들이 자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카오스 이론

인간의 두뇌 활동과 이것의 산물인 생각을 먼저 이해하기 위해서 나오는 개념이다.

인간의 이해하는 관문 리비도

욕심과 탐욕의 경계인 님비와 핀피

스스로 나를 구속하는 율리시스의 계약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벌레 마인드 버그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해석하는 프레임

합리화를 가장한 인지부조화

인간의 이성적인 비합리

기억을 날조하는 자기 생산

집단사고와 집단 극단화의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