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주관성:공동체적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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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주관성:공동체적 자아

간주관성 = “공동체적 자아, 공유적 이해, 합의된 객관성”

간주관성(間主觀性-intersubjectivity):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주관을 가지고 있다라는 개념.
즉, 자신에게 주관이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그 사람 나름의 주관이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것!
‘상호(相互)주관성,공동(共同)주관성’이라고도.

복수(複數)의 주관(主觀)에 공통적으로 성립되는 것.

예컨대, 내가 손가락을 다쳤을 때, 내 손가락의 육체적 상태, 즉 껍질이 벗겨지고, 살이 드러나고, 피가 흐르는 상태는 누구의 눈에도 분명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상호주관적이다. 그러나 내 손가락의 아픔 자체는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어서, 남이 나의 다친 손가락을 본다 하여도 그 사람이 나와 마찬가지로 손가락이 아플 리는 없다. 내 손가락의 아픔은 주관적일 뿐, 상호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상호주관적 사상(事象)을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심리학도 그것이 과학인 이상, 상호주관적인 사상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내관심리학(內觀心理學)은 자연히 쇠퇴하고 행동주의적 심리학이 성하게 되었다.

또한 E.후설은 상호주관성을 간주관성 또는 공동주관성이라고도 하고, 하나의 주관을 초월하여 다수의 주관에 공통적인 것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였다.

복수의 주관에서 볼 수 있는 구조나 인식의 공통점. 쉽게 말하면 타인 역시도 자기처럼 주관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로, 공동주관성 또는 간주관성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은 흔히 객관적인 것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며, 주관적인 것은 객관적이지 않고 비합리적이어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논문을 쓰는 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이 아마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의 모색일 것이다. 논문을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으로 쓰거나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나 선택보다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이나 선택을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한다면 그 논문은 학계에서 당연히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석·박사 학위 논문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작성해야 한다. 학위 논문에 작성 주체의 주관적인 의견이나 감정이 개입될 경우, 신뢰성과 타당성에 심각한 손상이 있다는 점을 들어 심한 비판적 공격을 받을 수 있다. 논문을 객관적으로 쓰기 때문에 논문을 읽으면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닐까? 논문 뒤의 감사의 글을 읽으면 눈물이 나지만 논문을 읽으면 골치가 아픈 때가 많다. 논문을 객관적으로 쓰고 논문 뒤의 감사의 글은 주관적으로 쓴다.

객관적인 글은 주로 논리적인 이성, 즉 머리에서 나오고 주관적인 글은 주로 감성적인 느낌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객관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무엇인 가장 객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개인의 주관적 의견이 다른 사람의 주관적인 의견과 만나면 간주관성(間主觀性)이 생긴다. 한 사람의 주관은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주관과 만나 상호 주관적인 의견을 만들어간다. 그 결과 생기는 간주관성이 가장 객관적인 의견이다. 이런 간주관성은 머리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의견을 벗어나 몸으로 직접 체험하면서 체득한 사실이나 지식을 의미하는 신체성의 공유과정에서 생긴다. 철학자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상대와 인간적으로 마주보면서 정신이나 의식보다 신체적 공감이 이뤄지는 순간이 바로 간신체성(間身體性)이 형성되는 순간이다. 인간은 타인과 신체적으로 시·공간을 공유하고 접촉함으로써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좀 더 큰 상호주관성 또는 간주관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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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주관성 = “공동체적 자아, 공유적 이해, 합의된 객관성”

일반적으로 심리학자들은 간주관성의 개념을 “활동에 참여한 자들 사이의 공유된 이해”로서 정의한다.
간주관성의 개념은 다학문적 개념으로서 “공동체적 자아, 공유적 이해, 그리고 합의된 객관성” 등으로 정의될 수 있다.
http://www.sohnwo.pe.kr/1.htm <–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음.

동양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유교는 무엇보다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와 균형성에 그 특성이 있다.
간주관성이란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서구의 개인주의와 다른 것이다. 인간의 관계망을 중요시하는 동양사상은 인간 망의 기본이 되는 예의 범절과 의리와 도리 등을 규정하였다. 한편 간주관성을 강조하는 동양사상은 유교만이 아니라 도교와 같은 초사회적 가치와 규범을 규정하는 데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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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상호간의 관계(間主觀 性·간주관성)-유교에서 말하는 인간관계, 극단적 구성주의자들은 객관성이라는 말 대신에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들에 의하면 지식의 간주관성은 사고하는 타인의 지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간주관성의 개념과 연구 유형

크로슬리(Nick Crossley)가 주장한 것처럼, ‘간주관성’의 개념은 다학문적 개념이다.그래서 이 개념은 철학에서 뿐만 아니라 심리학·사회학 등 사회과학에서 인간·지식·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인정되고 있다. 간주관성의 개념이 사회과학의 중심개념으로 도입되기 이전에 이 개념은 먼저 철학의 주요한 개념이었다. 특히 현상학자들에 의해 이 개념이 발전되었는데, 이것은 개인적 의식이나 자아가 아닌 ‘공동체적 의식’, 혹은 ‘공동체적 자아’를 의미했다. 후설(Husserl)은 인식의 주체가 선험적 자아라는 개인의 의식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궁극적으로 ‘간주관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개념은 실증주의나 객관적 사회과학방법론에 대한 현상학적 비판으로부터 발생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인간의 주관성을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며 객관성만이 신뢰할만하다는 실증주의에 반대하면서, 객관성이라고 불리우는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오직 인간들의 주관성이 포함된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객관성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간주관성의 개념은 점차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연구되고 있는데, 특히 심리학자들의 연구가 주목을 끈다. 일반적으로 심리학자들은 간주관성의 개념을 “활동에 참여한 자들 사이의 공유된 이해”로서 정의한다. 특히 괜치(A. Göncü)는 “간주관성이 어머니와 유아의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의도적 인식과 조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면서,간주관성의 ‘정서적 기원’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간주관성의 개념은 다학문적 개념으로서 “공동체적 자아, 공유적 이해, 그리고 합의된 객관성” 등으로 정의될 수 있다.

한편, 철학과 심리학, 그리고 사회과학 전반의 주요한 탐구주제인 간주관성의 연구는 학문적 관심에 따라 그 연구유형도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다. 예를들어, 프리(Roger Frie)는 철학과 심리학을 중심으로 간주관성의 연구유형을 분류하고 있다. 그는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으로 보는 홉즈(Hobbes)의 간주관성 이해와, “주체 상호간의 상호인식의 가능성”으로 보는 헤겔(Hegel)의 간주관성 이해를 중심으로 간주관성 연구유형을 구분한다. 한편, 프리와는 달리 크로슬리는 간주관성의 유형을 철학의 전통 속에서 세가지로 유형 분류를 하고 있다. 첫째 유형은 훗설(Husserl)의 현상학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서, “간주관성의 에고적 접근”(egological modes of intersubjectivity)을 말한다. 둘째 유형은 부버(Buber)의 “나와 당신”(I-Thou)의 관계성 속에서 간주관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유형은 훗설의 간주관성 개념이 에고적 편견(egological bias)에 의해 진술된 점과는 달리, 부버의 간주관성은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적 개념으로 진술되고 있다. 셋째 유형은 헤겔(Hegel)과 맑스의 이해에 근거한 간주관성이다. 헤겔에게 있어서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은 간주관적 현상으로, 의식 사이의 상호 인정을 통해 성취되는데, 이러한 자기의식은 자동적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투쟁’ 속에서 탄생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크로슬리와 프리가 심리학과 철학에서 탐구되고 있는 간주관성의 개념을 중심으로 그 유형을 분류해 주고 있지만, 프락시스 교육론에 적절한 유형분류라고 보기에는 한계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간주관성을 인간의 프락시스, 특히 교육적 프락시스와 연결하여 적절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자는 프락시스 접근의 관점에서 간주관성 개념의 연구들을 다음 세가지로 나누어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하버마스를 중심으로 연구된 언어를 중심으로 한 간주관성의 의사소통적 행위 접근이다. 둘째는 빈스왕거와 가다머를 중심으로 연구되는 간주관성의 정서적 접근이다. 셋째는 간주관성 개념의 획득을 위한 테오프락시스 접근의 가능성으로서, 앞의 두 입장이 갖고 있는 언어적·정서적 접근을 인정하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한계점, 곧 기독교교육학적 관점에서 앞의 두 입장을 비판하고 변증법으로 통합하려는 접근이다.

간주관성의 의사소통적 행위 접근



간주관성의 개념을 탐구하는 첫 번째 유형의 접근은 하버마스(Habermas)의 ‘의사소통행위 이론'(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에 근거한 접근이다. 호르크하이머(Horkheimer)와 아도르노(Adorno)의 사상을 토대로 구성된 프랑크프르트학파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알려진 하버마스는 프랑크프르트학파의 주장을 따르면서도 그들의 기본적인 전제를 비판하며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말해 도구적 관계의 이행 즉 ‘타자'(the other)를 객관화하여 정복하려는 시도가 자연과 인간의 지배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주체로서의 자기자신에 대한 지배를 지향하는 것이라는 도구적 이성에 대한 프랑크프르트학파의 비판적 입장을 하버마스는 동의한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프랑크프르트학파와 근본적으로 다른 전제에서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현대성(modernity)이란 오직 도구적이거나 합목적적이며, 그래서 지배의 관계를 구성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하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주체의 세계와 동반해서 도구적 관계성 보다는 ‘상호작용적 관계성’이 존재하며, 이러한 관계의 매개는 ‘의사소통의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하버마스는 관계의 도구적 개념 외에 새로운 한 영역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의사소통적 행위'(communicative action)의 영역이다. 여기서 의사소통적 행위의 영역은 언어(language)의 사용에 근거하며, 그 목적은 대상(objects)에 대한 기술적 통제(technical control)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상호이해에 둔다. 이런 의미에서 의사소통적 행위는 도구주의와 구별되는 합리성으로, ‘합의적 규범'(consensual norms)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그의 간주관성의 개념과 의사소통행위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 특징을 다음 네가지로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하버마스에게 있어 ‘간주관성’의 개념은 ‘공유적 이해'(shared understanding)와 ‘배경적 지식'(background knowledge)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개념은 이러한 이해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상보적 관계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의사소통적 행위자는 “객관적 세계에서(one objective world), 공통적인 사회적 세계에서(common social world), 그리고 그들 각 자신의 주관적 세계에서(subjective world) 동시에 무엇인가와 관계를 맺게 된다.”이러한 간주관성에 의해 의사소통을 조직적으로 왜곡시킨 지배와 권력의 문제를 수정할 수 있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에 대하여”(1970)와 “의사소통능력 이론에 대하여”(1970)라는 논문에서부터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I, II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의 해결을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개념에서 찾고 있다.

둘째, 하버마스의 간주관성 개념은 ‘의사소통행위 이론’으로 표현되는 특징을 갖는다. 하버마스가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에서 제기한 의사소통 행위의 개념에 대한 주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사회적 행위자가 어떻게 그들의 쌍방적 상호작용을 조절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하버마스의 대답은 사회적 행위(social action)의 두가지 독특한 형태를 소개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공'(success)과 ‘이해지향'(reaching understanding) 행위이다. 이 두 형태는 각각 전략적 행위(strategic action)와 의사소통적 행위(communicative action)로 불려진다. 이 두 행위는 사회적 행위가 조절되는 방식인 것이다. 여기서 비록 의사소통 행위가 의사소통에 의존하는 것이지만,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행위’와 ‘의사소통’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사소통 행위는 언어행위를 통하여 조절되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한 형태이지만, 의사소통은 이러한 행위에 의해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초점은 행위의 조절(coordination)에 있다. 즉 이러한 조절이 ‘언어’를 통하여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면, 의사소통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이상적 담화상황(ideal speech situation)이 형성되고, 이해에 도달함으로써 간주관성에 이르게 된다.

셋째, 하버마스의 간주관성의 개념은 ‘언어행위(speech act) 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는 독특성이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은 ‘언어행위’ 이론의 토대 위에서 구축되었다. 그는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의 철학이 여전히 주체-객체 중심에 근거한 “의식 철학”(philosophy of consciousness)에 근거해 있다고 비판하면서, 의식철학의 고갈된 패러다임을 극복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와 달리, 더 이상 역사의 자기구성적 주체의 이념에 합리성의 범주를 설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이 범주를 행위의 근본적 상황 속에, 그리고 주체 사이(between subjects)의 언어적 조절의 형식 속에 위치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와그너(Wagner)와 지프리안(Zipprian)이 비판이론을 일컬어 “주체의 영역”으로부터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으로 합리성의 차원이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다. 결국 하버마스는 이성의 기초를 언어적이고, 주체의 의사소통 능력에 위치시키고 있다. 특히 하버마스는 언어행위의 구문론적 분석을 넘어서, 의사소통 행위 이론에 발의행위(illocution)와 발동행위(perlocution)에 중심적인 독특성을 제공해 주고 있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행위(communicative action)를 발의행위로, 그리고 전략적 행위(strategic action)를 발동행위로 동일시하였다던 것이다.

넷째, 간주관성과 자아정체감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서, 하버마스는 미드(Mead)의 자아이론에 근거하여 의사소통 행위가 개인적 정체성을 탄생시킨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아정체감(Indentity) 형성은 언어적 의사소통의 매개를 통하여 발생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의사소통행위가 자율적 주체들(atonomous subjects) 사이의 대화로써 이해되어져서는 않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개인의 자율성은 상호간의 ‘의사소통적 프락시스'(communicative praxis)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비에스타(Gert Biesta)가 “우리의 의도와 열망, 우리의 감정 같은 것들은 의사소통적 프락시스에 의해 구성되어지며, 다른 어떤 방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은 적절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개인적인 언설이나 행위는 공통적인 언어와 행위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감을 이해 도달(reaching understanding) 과정 속에서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사회적 행위가운데 참여한 우리의 파트너를 통하여 ‘의사소통적 프락시스’에 의해서 폭로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하버마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주관성은 인간의 간주관성(human intersubjectivity)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으며, 간주관성은 언어행위로 표현되는 행위(action)에 의해서 이해된다.

이상에서 논의한 하버마스의 간주관성 개념은 크게 세가지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첫째, 하버마스는 간주관성을 ‘의식’의 패러다임에서 ‘언어’의 패러다임으로 변화시킨 점이다. 특히 고전적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의식철학의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성을 주체적 차원에서 이해하던 것을 넘어 간주관성으로 파악한 점과 함께, 합리성의 개념을 언어철학과 연결시켜 확대생산하여 간주관성을 언어행위와 연결시킨 점은 그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하버마스가 간주관성의 개념을 합리적인 의사소통 행위 구조 속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파악한 점이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입장은 고전적 모더니즘이 이성의 도구적 이해를 마치 이성의 전체로서 간주하는 고전적 모더니즘의 한계를 비판하면서도 궁극적으로 모더니즘의 대안이 소위 이성의 부정을 통한 해체주의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모더니즘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성의 해방적 성격이나 의사소통적 활동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한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버마스는 여전히 의사소통적 행위를 통한 이성의 해방적 능력을 신뢰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셋째, 하버마스는 인간의 주관성이 합리적 의사소통 행위에 의한 간주관성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주관성에 대한 간주관성의 우위를 시사한 점이다. 이것은 인간을 공동체적이고 사회적 존재로 새롭게 파악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하버마스의 인간 주체의 이해는 의식철학으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철학의 인간이해와 상당한 면에서 상충되지만, 인간을 공동체적이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언어행위를 통한 의사소통적 방식으로 간주관성을 형성한다는 그의 주장은 프락시스를 지향하는 기독교교육학의 측면에서 설득력있게 수용될 수 있다.

그러나 위와같은 긍정적 평가와 함께 하버마스의 간주관성의 주장은 같은 맥락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에 대한 비판은 다음 다섯가지로 지적될 수 있다. 첫째, 하버마스의 간주관성 개념은 지나치게 합리적인 약점을 갖는다. 조아스(Joas)는 하버마스의 간주관성의 개념이 언어적 형식으로 축소되었다고 비판한 바 있다. 다시말해 언어행위로 표현되는 의사소통 행위만이 간주관성을 형성한다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언어외적인 요인들도 간주관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미데마(Siebren Miedema)도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하버마스는 언어의 합리성보다 은유적인 언어(metaphorial language)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간주관성을 위한 합리적 언어 외적 요인들, 예컨대 ‘사랑’을 비롯한 ‘정서적 요인’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약점을 적절하게 지적한 사람은 프리(Roger Frie)로서, 간주관성의 정서적 차원을 강조한 바 있다. 크로슬리도 하버마스가 간주관성의 개념을 언어적 의사소통 행위와 동일시함으로써, 간주관성이 갖고 있는 인간의 신체성(embodiment)·감성·인식이나 상상력 등을 소외시켰다는 점을 적절하게 지적하였다.

둘째, 하버마스의 간주관성 개념은 언어철학의 측면에서 문제점을 갖고 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간주관성은 언어행위, 특히 발의행위를 통해 이해에 도달할 때 가능하다. 다시말해, 그는 썰(Searle)의 발의행위(illocutionary act)를 상호이해와 합의를 지향하는 ‘의사소통적 행위’로 동일시하고, 발동행위(perlocutionary act)를 성공과 결과만을 지향하는 ‘도구적 혹은 전략적 행위’라고 단순화하였는데, 그것이 타당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제기이다. 오히려 언어가 갖고 있는 해방적 능력은 단순한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구체적인 행동을 지향하는 발동적 행위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강희천이 발의적 행위와 발동적 행위를 수행적 언어의 측면에서 함께 취급한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셋째, 하버마스의 간주관성 개념의 문제점은 ‘보편성'(unversality)에 관한 것이다. 하버마스의 타당성 주장(validity claims)이 과연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는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토의를 통해 세가지 타당성 주장, 곧 객관적 실재의 측면에서의 타당성 주장(‘진리성’, truth), 사회적 실재의 측면에서의 타당성 주장(‘정당성’, rightness), 그리고 내적인 실재의 측면에서의 타당성 주장(‘진실성’, truthfulness)을 제시하면서, 이해에 도달한다는 것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합의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내적인 실재와의 합의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타당성 주장이 간주관성과 관련하여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쉬로스버그(Schlosberg)가 지적한 것처럼, 의사소통 행위로부터 나오는 것이 반드시 ‘궁극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 없으며, 보편성을 위해 지역성(locality)이 필요한 조건이 될 경우의 타당성 주장은 바로 ‘지금 여기’라는 지역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의사소통적 행위에 의한 간주관성은 지역성과 함께 다원성(plurality)이라는 맥락에서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의사소통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의사소통의 과정(process)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대화의 결과에 따르는 합의(consensus)에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이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행위의 교환을 도구적 차원에서 ‘성공지향적 태도’와, 이해와 동의의 도달을 지향하는 ‘의사소통적 태도’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양자 모두의 강조점은 과정(process) 보다는 결과나 산출(outcome) 지향적이 아닌가 하는 비판이다. 벤하빕(Benhabib)도 이러한 하버마스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우리는 합의(consent)를 ‘최종목적'(end-goal)으로서가 아니라 진리성이나 타당성의 협력적 구성을 위한 ‘과정'(process)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의미가 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합의보다는 활력있는 프락시스로써 간주관성과 이성적 논의를 유지하려는 실천에 보다 더 중점을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소통적 행위를 합목적적이라기 보다는 과정적 차원에서 보다 철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간주관성은 하나의 의사소통 행위의 결과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행위를 통한 간주관성의 이해는 기독교교육의 측면에서 그 제한점을 갖고 있다. 앞에서 많은 학자들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행위이론이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언어중심적이라고 비판한 것처럼, 그것은 종교적 초월의 차원을 배제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간주관성의 합리적-언어적 접근의 대안으로 정서적 접근 뿐만 아니라, 신학적 접근도 중요하게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단순히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도 아니지만, 동시에 정서적 존재만도 아니라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는 인식이 간주관성의 이해 속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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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주관성의 정서적 접근


간주관성의 개념을 언어적-합리적 차원에서 연구하는 의사소통적 행위론자들이 비언어적이고, 비합리적인 차원의 문제를 소외시킨 것에 반대하며 간주관성의 개념에 대한 정서적 접근을 시도하는 그룹이 있다. 이 입장은 빈스왕거(Binswanger)와 가다머(Gadamer)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먼저 빈스왕거는 사르트르 초기 철학의 개인주의와는 다른 주관성과 간주관성의 이론을 보여준다. 사르트르가 주관성의 이해를 위해 개인적 주체의 미완성적 욕망(unfulfilled desire)을 강조한 반면, 빈스왕거는 상호인식(mutual recognition)의 가능성을 그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즉 빈스왕거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한 주체의 출현을 주장하면서, ‘인식'(recognition)에 대한 헤겔의 주제를 반복하고 있다. 주체(subject)는 오직 상호인간적 상황(interhuman situation)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초점을 ꁹ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의 간주관성 개념이다.

빈스왕거의 간주관성 개념은 다음 세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간주관성에 대한 그의 관계이론(the theory of relation)은 하이데거의 근본적 존재론(fundermental ontology)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이론의 주요한 특징을 진술하고 있는 Grundformen und Erkenntnis menschlichen Daseins는 하이데거의 Sein und Zeit를 상술한 것이다. 빈스왕거에 의하면, 상호인간(interhuman)차원에 대한 하이데거의 진술은 인간상호간의 ‘사랑’의 중요성을 배제시키고 있으며, 진정성(authenticity)의 성취 속에서 타자성(otherness)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빈스왕거가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주 요지는 Sein und Zeit 속에 타자성의 신분에 문제제기하는 것이며, 간주관성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보다 명료화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프리(Frie)가 빈스왕거의 주장을 가리켜 “그것은 하이데거의 Sein und Zeit에 반영된 결점을 극복하려는 시도로서 하아데거로부터 부버(Buber)의 대화의 철학으로 전환한 것이다”라고 분석한 것은 적절한 지적이다. 이런 점에서 빈스왕거의 주장은 시사적이다: “‘현존재의 진정한 진리’는 확고한 ‘진정한 자아'(authentic self)의 이러한 방식 속에서 획득될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진리는 사랑 곧 타자와 더불어 존재하는 근원적 존재(the original being-with-one-another)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빈스왕거의 Grundformen의 목적은 현존재(Dasein)에 대한 하이데거의 ‘나의 소유성'(mineness)과 ‘염려'(solicitude)의 개념을 상보적 사랑의 이론으로 보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하이데거의 ‘근본적 존재론’에서 간주관성에 대한 만족스러운 이론을 쁹지 못한 빈스왕거는 마틴 부버의 대화의 철학으로 전환하는 특성을 갖는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분석’이 진정한 현존재의 개별화를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한 반면에, 부버는 관계에 대한 존재론적 우선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부버의 대화의 이론(theory of dialogue)이 빈스왕거에게 커다란 전환점을 제공해 주었다. 우드(Robert Wood)가 부버의 대화의 철학을 “사회적 존재론”(social ontology)이라고 규정하였던 것처럼, 빈스왕거는 간주관성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 존재론으로부터 관계의 철학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관계적 존재”(being-with)의 문제가 현존재에 대한 그의 분석 주변에 놓여있는 것이라면, 부버에게 있어서 관계의 문제 혹은 대화적 삶은 그의 철학체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부버에 의하면 ‘나와 당신'(I-Thou)의 관계 속에서의 ‘나’와, ‘나와 그것'(I-It)에서의 ‘나’는 다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와 당신’에서의 ‘나’는 존재전체와 더불어 말해질 수 있는 것인 반면, ‘나와 그것’에서의 ‘나’는 결코 존재전체와 관계되어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버의 ‘나와 당신’의 관계는 상호성(mutality)과 개방성(openness), 그리고 솔직성(directness)의 특징을 가진 반면, ‘나와 그것’의 관계는 이러한 특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당신’의 관계는 동등한 두 주체(subjects)의 관계라고 한다면, ‘나와 그것’의 관계는 주체(subject)와 객체(object)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화는 단순한 ‘언어적 의사소통의 양태’가 아니라, 상호인간관계(interhuman)의 차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빈스왕거가 위와 같은 부버의 관계의 철학을 수용하면서도, 부버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부버가 ‘나’와 ‘당신’을 사이성(betweenness)에 의해서 분리시키고 있지만, 빈스왕거는 ‘이중적 우리성'(dual we-hood)의 개념으로 사랑의 관계의 구성적 파트너로 개념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빈스왕거의 입장은 부버의 ‘나와 당신’의 관계를 더욱 철저화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셋째, 빈스왕거가 제시한 간주관성으로서 사랑의 현상학은 간주관성의 개념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상보적 사랑의 관계성’ 혹은 ‘사랑의 이중적 양태'(dual mode of love)는 인간존재의 가장 근원적 형태이다. 그가 주장하는 ‘사랑의 이중적 양태’는 서로를 위한 사랑의 존재(loving Being-with-one-another)의 구조로서, 부버의 ‘나-당신’의 관계와 가깝다. 그러나 이 사랑의 관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로서, 두 분리된 존재의 종합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매를로-퐁티(Merleau-Ponty)가 사랑의 관계의 본질을 진술하면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황(undivided situation)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주장한 것은 적절한 지적이다.

그런데 빈스왕거가 부버를 비판하면서 제기한 ‘우리성'(we-hood)이란 “서로 다른 둘의 실존적 깊이를 연결하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독립적이고, 본래적인 양태라는 점이다.” 이러한 빈스왕거의 ‘우리성’ 개념은 존재론적으로 나와 당신의 분리된 존재에 선행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성’은 나와 당신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인 것이다. 바로 이점이 빈스왕거가 부버의 존재론을 극복한 것이며, 그의 존재론을 더욱 철저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빈스왕거의 사랑의 현상학은 훗설의 초월적 자아나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을 통해 얻어지는 존재론적 현상이 아니라 존재의 ‘인류학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빈스왕거의 간주관성에 대한 정서적 접근을 평가한다면, 첫째, 앞에서 살핀 합리적-언어적 간주관성 이해를 보충하는 맥락에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특히 빈스왕거가 간주관성을 사랑의 관계에서 찾음으로써 언어외적-정서적인 측면이 간주관성 형성에 중요한 요인이 됨을 지적한 것은 간주관성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데 유익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빈스왕거가 부버의 대화의 철학을 수용하면서도 각 주체가 독립된 주체로 분리되어 있다는 부버의 존재를 넘어서 각 주체 안에 ‘우리성'(we-hood)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인류학적 존재이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리가 지적한 것처럼, 빈스왕거에게 있어서 인간의 현존재는 나와 당신(I-Thou)의 관계에 참여할 수 있는 잠재성을 이미 갖고 있으며, 따라서 사랑의 이중적 관계 속에서 자아실현(self-realization)과 존재의 충일성을 성취할 수 있다는 지적은 우리의 한국의 존재이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컨대 한국인들이 자신을 표현할 때 ‘나’라는 표현 대신에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듯이, 한국의 의식구조는 타자를 주체와 구별되는 개념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나의 주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빈스왕거의 간주관성에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비록 그가 간주관성에 대한 ‘인류학적 존재’의 차원을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인류학적 개념을 더욱 철저히 발전시키지 못한 한계점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철학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정신치료 의사로서 철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였기 때문에 그러한 한계는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간주관성을 사랑의 관계 속에서 파악할 때,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적인 인식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다머(Gadamer)의 주장은 고려해볼만 하다. 그는 앞에서 진술한 하버마스나 빈스왕거처첨 ‘간주관성’의 개념을 그의 철학에서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앞의 학자들과는 달리 그는 해석학적 입장에서 간주관성을 이해하는데, 앞의 학자들처럼 현대성의 담론으로서 “소여성과 실증성의 개념”(the concept of the given, of positivity)을 비판하면서, 훗설의 ‘생활세계'(life-world)에 대한 현상학적 개념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그는 생활세계의 개념을 ‘모든 객관주의 반명제’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타자와 서로 관련을 맺으며 공동적인(communal) 생활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가다머는 간주관성의 개념을 두가지 맥락에서 진술하고 있다. 첫째, 그는 간주관성의 개념을 ‘나와 당신'(I-Thou)의 관계로 설명해 주고 있다. 이것은 가다머가 진술한 ‘해석학적 경험'(hermeneutical experience) 속에서 나타난다. 그는 해석학적 경험을 전통(tradition) 및 언어(language)와 관계시켜서 이해하는데, 여기서 그는 전통을 당신(Thou)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전통은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대화 가운데서 진정한 파트너이며, 우리가 그 속에 속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당신(Thou)은 대상(object)이 아니라 우리의 관계성 가운데 존재하는 또 다른 주체(subject)이다. 그리고 해석학의 영역에서 ‘당신'(Thou)에 대한 이러한 경험과 병행하는 것을 가다머는 “역사적 의식”(historical consciousness)라고 부르고 있다. 당신(Thou)에 대한 이해가 당신을 한 인간으로서 인식할 때, 역사 의식은 타자의 타자성과 타자성 속의 과거를 당신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가다머에게 있어서 과거와 전통은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해석학적 경험 속에서 ‘당신'(Thou)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가다머의 간주관성 개념은 ‘편견'(prejudice)의 개념과 관련시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전통과 텍스트 그리고 해석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객관성과 중립성에 대한 관념은 자기 자신의 편견에 대한 자각과 함께 텍스트의 새로움(newness)이란 관념으로 대치된다. 그래서 가다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자신의 편견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텍스트는 그 자신을 모든 새로움 속에 제시될 수 있으며, 자기자신의 선의미(fore-meanings)을 반대하는 자기자신의 진리를 주장할 수 있다.” 가다머는 이러한 관념을 발전시키면서 모든 이해란 편견(prejudice)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편견의 부정이 오히려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계몽주의의 근본적인 편견은 편견 자체를 거부하는 편견이며, 이러한 태도는 전통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해석 주체의 편견을 텍스트의 새로움을 위한 전제로써 파악하는 것은 주체의 감정과 경험을 해석을 위한 부정적 요인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창조적 해석의 조건으로 파악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결국 가다머는 인식주체의 해석학적 편견을 긍정적인 면으로 제시하면서 동시에 인식대상의 텍스트로서 전통과 언어를 인격적인 ‘당신'(Thou)으로 보는 것은 모더니즘이 주관성과 객관성으로 양분하던 것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관성의 중요성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가다머의 이러한 입장은 간주관성의 개념을 인지적-의사소통적 접근 유형과 달리, 인간의 편견과 정서적 측면을 강조하는 면에서 간주관성에 대한 일종의 정서적 접근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간주관성에 대한 가다머의 접근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개인주의적 경향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무어(M. Moore)가 지적한 것처럼, 간주관성에 의한 지식의 사회적 구성체라는 측면에서 가다머의 간주관성은 개인들 사이의 간주관적 관계에 초점을 모으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간주관적 관계를 개인적 관계보다는 공동체적이고, 문화적이며, 인종적 그룹들에 의해 다시 성찰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가다머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스미스(Allen Smith)는 가다머의 해석학을 ‘공동체’와 연결시켜 새롭게 진술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그는 프로네시스(phronesis)·프락시스(praxis)·적용(application)의 문제를 해석공동체와 관계시켜 설명하면서, 해석의 주체(subject)를 개인이 아닌 공동체(community)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가다머의 ‘프로네시스’의 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폴리스'(polis)와 연결시켜 이해할 때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가다머가 생각하는 공동체의 종류란 연대성·대화·의도적 청취(intentional listening)·개방성과 연결된 공동체라는 것이다. 번슈타인도 가다머의 프로네시스에 관한 이해는 그리스의 폴리스(polis)라는 배경을 전제로 쓰여졌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공동체로서의 ‘폴리스’란 ‘자연적 삶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프로네시스’의 운영에 요구되는 공동체는 법과 윤리적인 원리가 존재하는 공동체였던 것이다.

결국 간주관성은 사랑과 같은 정서적 요인에 의해서, 혹은 타자를 ‘당신’으로 파악하려는 인격주의적 접근 속에서, 더 나아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 지향적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간주관성의 이해는 합리적-언어중심적 간주관성 이해를 넘어서는 간주관성에 대한 새로운 통찰로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식의 형성자(shapers of knowledge)로, 그리고 사건이나 공동체를 또 다른 주체요 타자로서 인정하게 되며, 간주관성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편견’과 ‘감정’ 뿐만 아니라 ‘당신’으로서의 타자를 통하여 우리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듣고, 또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부터 봄으로써 가능한 한 완전히 타자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서적-해석학적 간주관성은 합리적-언어적 간주관성의 약점을 극복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으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여전히 그 한계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간주관성의 가능성은 단순히 언어와 합리성, 그리고 인간의 정서만으로 제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간주관성은 언어외적인, 정서외적인, 또 다른 차원에서도 고려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교육학의 관점에서 신학적 측면, 특히 영성(spirituality)이 간주관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통로로 고려될 필요가 있다.